‘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이 한때 유행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 문득 ‘아프니까 노년이 다가왔구나’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 예전에는 병원에 한 번 다녀오면 그만이었지만 이제는 “괜찮다”는 말조차 조심스럽다. 통증 하나, 기침 한 번에도 괜스레 마음이 무거워진다. 자신을 돌보는 일도 예전처럼 쉽지 않다.
나이 든다는 것은 어쩌면 타인의 손길 없이는 완전한 존재로 살아가기 어려운 상태를 받아들이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강인함보다 유연함이, 독립보다 연결이 중요해지는 시간.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조금씩 인정하게 된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 사회에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병원, 요양시설, 가정에서 이뤄지던 ‘보이지 않는 돌봄 노동’이 멈추자 사회의 일상도 함께 멈췄다. 그제야 우리는 깨달았다. 돌봄은 단지 가족의 책임이나 개인의 선의에 기댈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를 지탱하는 필수 기반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봄은 여전히 사적인 영역으로 밀려나 있다. 여성에게 과도하게 전가되고, 제도의 빈틈은 개인의 희생으로 채워진다. ‘누군가의 몫’으로만 여겨지는 한 돌봄과 그 노동을 감당하는 이들은 계속해서 사회의 그림자 속에 머물 수밖에 없다.
이제 돌봄은 모두가 함께 설계하고 실천하며 존중해야 할 사회적 책임이자 공동체의 윤리다. 아이를 키우고 노인을 돌보는 일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일상 속 작은 배려, 아픈 친구에게 전하는 말 한마디, 마음이 무너진 이에게 건네는 침묵의 동행. 이 모든 것이 돌봄이다.
돌봄은 인간을 존엄하게 대하는 태도이자 공동체가 스스로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병들 수 있고, 늙을 수 있으며, 서로에게 기대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그런 곳이야말로 회복력 있는 공동체다.
우리는 돌봄을 ‘윤리’의 문제로만 여겨선 안 된다. 이제는 ‘구조’의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 ‘누가 돌볼 것인가’보다 ‘어떻게 돌볼 것인가’ 그리고 ‘그 노동이 어떻게 존중받을 것인가’를 묻는 일이 더 중요하다.
정치는 돌봄을 설계해야 하고, 경제는 그 비용을 분담해야 하며, 교육은 돌봄의 방식과 가치를 가르쳐야 한다. 돌봄이 삶의 외곽이 아니라 중심이 될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함께 살아야 미래가 있다. 경쟁이 아니라 돌봄이 사회를 지속시킨다. 빠르게 달리는 사람보다 멈춰 선 이들의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더 많은 사회, 그곳이야말로 우리가 꿈꾸는 공동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