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인류의 역사를 400만 년으로 본다. 이 중 정착 생활을 한 것은 불과 1만 년 전이다. 이는 농경(農耕) 덕분이다. 농경은 씨앗을 뿌리는 파종이 핵심이다. 그래서 인류의 오랜 방랑을 멈춰 세운 일등 공신은 씨앗이다.
북극 스피츠베르겐섬에 국제종자저장고가 있다. 인류에게 재앙이 닥쳤을 때 후손들의 생존을 위해 107만 종의 씨앗을 보관하는 곳이다. ‘식물판 노아의 방주’로 불리는 이곳은 어떤 재해에도 견딜 수 있게끔 설계돼 있다. 우리나라 경북 봉화군. 여기 백두대간 수목원에도 글로벌 시드볼트(seed vault)가 있다. 지하 깊숙이 터널을 파서 국내외 야생식물 종자를 영구 보존한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은 레닌그라드를 900일간 봉쇄했다. 소련은 식량이 끊겨 아사자가 속출했다. 이 와중에도 바빌로프 식물연구소 연구원들은 보관 중인 종자만은 한 톨도 입에 대지 않았다. 결국 31명이 굶어 죽었다.
씨앗은 인류의 생존과 직결된 소중한 존재다. 그래서 예로부터 ‘하늘이 인간에게 준 선물’로 여겼다. 그런데 이젠 돈 냄새를 풍기며 상업 거래의 중심에 서 있다. 실제 파프리카 종자 1g 가격은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싸다. 현재 씨앗을 사고파는 글로벌 종자시장 규모는 대략 450억달러. 앞으로 대폭 늘어날 전망이다. 그래서 나라마다 종자주권을 내세우고 사용에 따른 로열티를 받는다.
우리 식탁에 자주 오르는 청양고추, 팽이버섯, 양송이가 있다. 이것을 먹을 때마다 독일, 일본, 이탈리아로 돈이 빠져나간다. 종자 로열티 때문이다. 이외에도 참외, 배추, 단호박, 양파, 심지어 콩나물까지도 로열티를 물어야 한다. 최근 10년간 이렇게 나간 돈이 1357억원이다. 우리가 소비하는 농산물 중 외국 종자가 70%를 차지하니 어쩔 도리가 없다.
19세기부터 전 세계를 돌며 종자를 수집한 나라가 미국이다. 한국에서는 100년에 걸쳐 토종 콩 종자를 채종해갔다. 그 결과 한국 콩이 미국 콩의 뿌리가 됐다. 현재 미국 농무부 유전자원보존소에 보관된 한국 야생 콩 씨앗만 해도 4000여 종에 달한다. 세계를 휩쓸고 있는 미국 콩산업의 모태가 알고 보면 한국 콩인 셈이다.
최근 우리나라도 ‘종자주권 회복운동’을 펼치고 있다. 우수한 국산 품종이 속속 탄생하면서 결실을 내고 있다. 무, 배추, 고추 등이 호평을 받고 버섯, 딸기, 키위, 토마토 등도 수출을 목표로 개발이 한창이다. 내친김에 외환위기 때 해외로 팔려나간 우리의 땡초, 청양고추도 되찾아오면 좋겠다.
지금 세계는 씨앗전쟁 중이다. 이 치열한 전장(戰場)에서 K종자도 태극마크를 달고 당당한 주역으로 활약하기를 기대해 본다. 이참에 채소나 과일을 살 때 물어볼 말이 하나 더 생겼다. “이거 국산 종자 맞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