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를 실제로 부수지 않고 충돌 안전성을 검증하고, 항공기를 추락시키지 않고 비상착륙 상황을 시험한다. 공장을 멈추지 않고 생산라인을 바꾸고, 데이터센터를 짓기 전 전력·냉각 흐름을 미리 계산한다. 프랑스 다쏘시스템이 말하는 ‘버추얼 트윈’은 현실의 제품과 공장, 설비를 가상세계에 재현해 먼저 실험하는 기술이다.
필립 로퍼 다쏘시스템 글로벌 브랜드 총괄 수석부사장은 이 회사의 글로벌 집행위원회 일원으로 카티아, 솔리드웍스, 에노비아 등 주요 브랜드와 포트폴리오를 총괄하고 있다. 국내선 현대자동차 등 주요 산업 고객도 맡고 있는 그는 최근 방한해 한국 기업들과 AI 팩토리, 반도체, 전력·냉각 인프라, 조선·자동차 산업 전환을 논의했다. 그는 “한국은 AI 팩토리 가치사슬에서도 핵심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특히 강조한 키워드는 ‘소프트웨어 정의 공장’이다. 자동차 업계가 소프트웨어 정의 차량(SDV)에 집중하고 있지만, 다음 승부처는 차량을 만드는 공장 자체의 소프트웨어화라는 설명이다. 아래는 그와의 일문일답.
▶이번 방한의 핵심 목적은 무엇인가.
"한국 산업 고객들과 AI 팩토리 전환을 논의하기 위해 왔다. 한국은 AI 팩토리 가치사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에도 엔비디아 AI 팩토리 가치 네트워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고객들을 만났다. 이들은 수요 폭증에 대응하기 위해 더 빠른 엔지니어링과 반도체 생산 속도의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엔비디아와 다쏘시스템 협력이 한국에서도 시작되는 건가.
"그렇다. 이번 방한의 목적 중 하나가 한국 고객들과 그 흐름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전 세계적으로는 이미 엔비디아와 다쏘시스템 협력의 혜택을 활용하기 시작한 사례가 있다. 한국에서도 이를 본격화하려 한다."
▶한국에서 어떤 기업들이 수혜 대상인가.
"세 가지 기업군이다. 첫째는 메모리와 반도체 부품을 공급하는 하이테크 기업이다. 둘째는 냉각 시스템과 전력 설비 기업이다. 셋째는 데이터센터를 짓고 인프라를 구축하는 건설·인프라 기업이다. AI 팩토리는 이들이 모두 연결된 복합 시스템이다."
▶AI 팩토리는 기존 데이터센터와 무엇이 다른가.
"AI 팩토리는 ‘시스템의 시스템’이다. 컴퓨팅 파워를 높이면 고성능 장비가 필요하고, 이는 다시 전력과 냉각 수요로 이어진다. 반도체, 장비, 전력, 냉각, 건설, 운영 인프라가 따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전체 구조 안에서 함께 설계돼야 한다."
▶소프트웨어 정의 공장이 왜 중요한가.
"모두가 소프트웨어 정의 차량, 즉 SDV를 말한다. 하지만 소프트웨어 정의 생산 시스템, 소프트웨어 정의 공장에 대해 말하는 기업은 많지 않다. 저는 여기에 미래가 있다고 본다. 앞으로 공장은 생산 품목과 물량을 훨씬 유연하게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뀐다는 뜻인가.
"기존 공장에서는 생산 방식을 바꾸려면 PLC(제조 장치 제어기)를 일일이 다시 프로그래밍해야 했다. 우리는 이런 PLC를 소프트웨어와 PC 기반 시스템으로 대체하는 방향을 보고 있다. 그러면 생산 속도와 구성을 즉시 바꿀 수 있다. 한국 제조업도 더 빠르게, 더 유연하게 생산 체계를 바꿔야 하는 압박을 받고 있기에 이번 방한에서 가장 중요하게 논의한 주제다."
▶공장이 소프트웨어화되면 현장 인력의 역할도 달라지나.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다만 AI가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할 것이다. 오늘날 PLC를 프로그래밍하는 인력이 있다면, 앞으로는 ‘AI 컴패니언’을 감시하고 안내하고 조율하는 역할이 더 커질 것이다. 공장에서 물리적으로 작업을 수행하는 대신 클라우드와 연결된 환경에서 공정 흐름을 미리 설계하고 운영하는 방식으로 바뀐다."
▶자동차 산업에서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
"첫 번째는 시장 출시 기간을 줄이는 것이다. 중국이 매우 큰 압박을 가하고 있다. 자동차 회사들은 더 빠르게 제품을 개발하고 시장에 내놔야 한다. 두 번째는 전동화다. 전기차는 더 이상 단순한 하드웨어가 아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결합된 플랫폼이다."
▶조선 분야에서는 어떤 변화가 있나.
"조선에서는 ‘시스터십’ 방식이 확산되고 있다. 하나의 마스터 선박을 만든 뒤 이를 기반으로 여러 파생 선박을 개발하는 방식이다. 항공우주·방산 분야와 비슷한 접근이다. 한국 대형 조선사들과도 이런 전환 프로젝트를 오랜 기간 진행해왔다."
▶조선 분야에서 버추얼 트윈 활용은 어디까지 왔나.
"선박의 버추얼 트윈을 만드는 작업은 여전히 노동집약적이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하지만 지금의 혁신 속도와는 맞지 않는다. 더 빠르게 만들고, 더 빠르게 배치하는 방법이 중요하다. 특히 미래의 탱커나 여객선은 에너지 시스템도 바뀌어야 하기 때문에 시스템 접근이 필요하다."
▶한국 제조업은 버추얼 트윈을 쓸 준비가 됐나.
"질문은 ‘준비됐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도달하느냐’다. 한국 기업들의 마음가짐은 이미 준비돼 있다고 본다. 이번에 만난 기업들도 “우리가 준비됐나”보다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역량이 필요한가”를 물었다."
안정훈 기자
▶버추얼 트윈은 아직 실험 단계인가.
"아니다. 이미 여러 산업에서 쓰이고 있다. 자동차, 항공우주, 생명과학, 소비재 분야에서 활용 사례가 늘고 있다. 한국도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이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21세기 제조업의 핵심은 무엇인가.
"20세기가 제품을 제조하는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지식을 제조하는 시대가 돼야 한다. 기업 안에는 PDF, 엑셀, 설계 파일, 사람의 머릿속에 흩어진 노하우가 있다. 이를 추출하고 형식화해 다시 활용하는 기업이 경쟁력을 갖게 된다."
▶한국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지식과 노하우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버추얼 트윈은 수단일 뿐이다. 궁극적인 목표는 기업이 지식과 노하우를 계속 만들고, 관리하고, 활용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주목하는 산업은 어디인가.
"첫째는 하이테크다. 데이터센터가 AI 팩토리로 전환되는 압력이 크기 때문이다. 둘째는 자동차·항공우주·조선을 포함한 운송·모빌리티다. 셋째는 소비재와 리테일이다. 특히 한국 화장품 분야의 수요가 강하다고 본다."
▶글로벌 기준으로 가장 빠르게 성장할 분야는 어디인가.
'향후 3년간 가장 큰 성장이 예상되는 분야는 생명과학과 인프라, 그리고 리테일이다. 제조업에서는 이미 다쏘시스템이 상당한 입지를 갖고 있다. 물론 제조업에서도 계속 성장하겠지만, 가장 큰 성장률은 생명과학과 인프라 영역에서 나올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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