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이민을 못 가면 네 계좌라도 반드시 이민 보내라.’
작년 5월 주식 시장을 담당하게 되면서 처음 접한 이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이전까진 미국 주식 투자에 큰 관심이 없었던 까닭에 남의 ‘계좌 이민’에 대해 별다른 의견이 없었다. 오히려 미국 주식 맹신에 희미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시장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게 됐다. 투자자들이 정보를 얻는 텔레그램 채널에는 이런 밈(meme) 이미지가 홍수처럼 떠다녔다. ‘형님, 제발 애들 생각해서 국장은 인버스만 하세요.’ ‘이래도 국장 안 접어? 유증 한 번 더 때려줄까?’ 당시는 그래도 코스피지수가 2700~2800선을 향해 상승하던 때다. 하지만 한국 증시에 대한 누적된 혐오와 불신이 극에 달한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걱정스러운 건 투자자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한국이 아니라 해외로 재설정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장기든, 단기든 서학개미 입장에선 한국 기업의 성공보다 미국 기업의 성공이 더 중요해진다는 의미다. 그럴수록 법인세니 노란봉투법이니 하는 국내 기업 관련 정책에 덜 민감해질 가능성이 높다. 나아가 저출생 등 경제 활력을 떨어뜨리는 사회 문제에도 무관심해질 수 있다. 시장 측면에서도 기업에 대한 투자자의 감시 기능이 약해져 악질 좀비기업이 늘고 증시 건전성이 악화될 것이다.
10년 전쯤 유행하던 ‘헬조선’ 류의 조어가 어느 순간 자주 들리지 않게 된 건 어쩌면 코인과 해외 주식이라는 대안이 생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라 욕할 시간에 코인 공부, 해외 주식 공부 더 해서 돈을 벌면 그만이다. 실제로 지난 대선에서 자포자기 심정으로 미국 주식 공부에 더욱 몰두하는 사람을 여럿 봤다. 한국이 싫어 가족들 데리고 이민 간다는 건 옛말. 요즘은 해외 주식 계좌만 트면 절반은 이민 효과를 낼 수 있다. 국내 개인 투자자의 미국 주식 매수금액이 지난해만 375조원이다.
그런 면에서 국내 증시의 이번 ‘불장’이 반갑다. 단순히 주가가 올라 사람들이 돈을 벌고 소비하기 때문이 아니라 국내 증시가 구조적으로 재평가돼 투자자를 붙들어 놓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엿봤기 때문이다. 미국 유학 간 인재들이 눌러앉지 않고 돌아와 우리 사회에 기여하게 된 것과 비슷하다면 과한 해석일까.
실제 서학개미들이 국장으로 복귀하고 있다. 국내 투자자는 올 1~4월 내리 월평균 4조~5조원 규모로 미국 주식을 순매수했는데, 5월과 6월에는 순매도로 돌아섰다. 국내 증시 대기 자금인 투자자 예탁금은 지난달 말 기준 68조9724억원으로 2022년 1월 말(70조3447억원) 후 최고치다.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이해관계의 유출’ 흐름을 돌려놨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제 중요한 건 이번 흐름을 한때의 사이클이 아니라 구조적 상승세로 만드는 일이다. 이재명 정부의 흑묘백묘 식 정책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상법 개정은 미지의 영역이다. 이사의 충실 의무를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해도 개정 상법 자체가 기업의 주주환원을 직접 강제하는 것도 아니다. 기대와 달리 기업들이 빗발치는 소송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주가가 하락할 가능성도 있다.
여의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의 얘길 들어 보면 오히려 배당소득 분리과세와 같은 실용 정책에 대한 기대가 크다. 야당일 때는 ‘부자 감세’ 프레임이 중요했어도 이제는 집권당 차원의 대승적 안목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대주주가 배당의 절반(45%)을 징수당하는 지금의 구조에선 당연히 소액주주까지 배당 가뭄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대주주와 일반주주를 동등하게 만드는 게 정책 기조라면, 대주주에 대한 징벌적 세제를 개혁해 일반주주로 자금이 돌아가게 만드는 것도 그 방향에 부합하는 일이다.
불과 1년 전 국내 증시는 더불어민주당의 금융투자소득세 강행 우려에 신음하고 있었다. 다행히 금투세를 완전 폐지하기로 한 실용적 판단이 최근 코스피 질주의 밑바탕이 됐다. 이념에 사로잡혀 금투세를 강행했다면 해외로의 자금 탈출은 더 빨라졌을 테고, 국장은 영원히 서학개미를 품지 못한 채 조롱의 대상이 됐을지도 모른다. 코인과 미장으로 돈을 벌어 한국에선 강남 아파트나 사는 기형적 자산시장, 이번 골든타임에는 바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