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이 된 물리학자[이기진의 만만한 과학]

1 month ago 5

이기진 교수 그림

이기진 교수 그림
오랜만에 제자 김 박사에게 안부 전화가 왔다. 매년 고맙게 설날이 되면 전복을 선물로 보내준다. 선물이 도착하면, 이날은 일찍 퇴근해 딸아이와 전복을 손질해 먹는 날이다. “아빠, 전복 내장에 있는 쓸개는 먹으면 안 돼.” 전복을 정성스럽게 손질해서 반은 미역국으로, 반은 버터구이로 요리해 먹는다. 이맘때 일 년에 딱 한 번 먹는 전복은 별미 중 별미다.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김 박사와는 석사과정을 거쳐 박사를 마치고 연구원까지 거의 10년을 함께 보냈다. 인생에서 10년을 한 공간에서 함께 보낸 세월이 그 당시는 몰랐지만 돌이켜 보니 상당히 긴 시간이었다. “10년이라니!” 뭐 이런 소리가 절로 나온다. 다시 생각하면, 물리학 공부를 10년 하면 홀로 설 수 있는 진정한 과학자가 되는 것이다. 나 역시 석사과정부터 박사후 연구원까지 12년을 보냈다.

논문이 출판되면 이를 기념하기 위해 연구실 식구들과 학교 앞 단골 삼겹살집에서 다 같이 축하했다. 한 편의 논문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애쓰고 고생했던가. 연구 초반에는 김 박사가 술을 많이 마셨는데 박사과정을 마칠 즈음에는 단호하게 술을 끊었다. 술친구가 사라졌다는 아쉬움이 컸지만, 그 후 커피에 심취한 김 박사 덕에 연구실이 커피 향으로 가득 채워졌다.

가끔 내 쓴소리에 눈물을 뚝뚝 흘리던 김 박사의 모습이 기억이 난다. 짠하고 후회스러운 일 중 하나다. 보내준 선물에 고맙다고 연락을 하자 다시 안부를 전해온다. “교수님, 건강하시죠?”

김 박사는 현재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교통과에서 일하고 있다. 교통사고가 나면 충돌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사용해 사고 전후의 충돌 상황을 재현하고 차량의 결함도 분석한다. 국과수는 수사기관 등이 요청하면 범죄 수사와 사건·사고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감정을 수행하는 곳이다.

문자메시지로 ‘물리학이 (업무에) 도움이 되느냐’ 물어보니 답장이 바로 도착한다. “교수님, 자동차 관련 기술이 워낙 급격하게 발달해서 대응하는 게 쉽지 않지만, 중앙선 침범 여부 충돌 원인 등을 분석하거나 사고 흔적을 감정하는 데는 물리학이 바이블입니다.^^”

국과수가 정식으로 발족한 해는 1955년 3월이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이다. 연구소가 세워질 당시만 해도 법의학에 한 명, 이화학에 미군과 한국인 한 명씩 근무했다고 한다. 지금은 유전학, 독성학, 화학, 법공학, 안전, 디지털, 교통 등 부서가 많이 늘어났다. 그만큼 전문화된 것이리라. 과학수사연구소를 지탱하는 핵심적인 힘은 ‘과학적 방법’에 있다.

1990년대에 TV 드라마 ‘형사 콜롬보’가 인기였던 적이 있다. 형사가 꾸부정한 어깨에 후줄근한 바바리코트를 입고 집요하게 살인범에게 질문을 하면서 범인의 살해 방법이나 증거 조작을 밝혀내는 드라마였다. 오직 추리를 통해 범인을 잡았으니, 지금 생각하면 방법이 원시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과학수사는 응용학문이다.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과학이다. 세상은 변해 과학자들이 탐정의 역할을 하고 있다. 김 박사의 역할을 기대해 본다.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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