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국회에서 잠자는 K칩스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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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국회에서 잠자는 K칩스법

“정치권이 이번엔 정신 차린 줄 알았지만 ‘역시나’로 흐르는 분위기다.”

반도체업계 고위 관계자는 무산 가능성이 커진 ‘K칩스법’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K칩스법은 반도체시설 투자 세액공제율을 15%에서 20%로 높이고, 첨단 연구개발(R&D)시설 투자세액 공제율을 대폭 확대(1%→20%)하는 내용이 포함된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이다. 핵심 엔지니어의 주 52시간 근무제 적용 면제(화이트칼라 이그젬션) 허용 여부로 뜨거운 감자가 된 반도체특별법이 중장기 경쟁력 강화 방안에 초점을 맞췄다면, K칩스법은 기업에 당장 혜택을 주는 인센티브 제도다.

작년 11월만 해도 K칩스법은 순탄하게 국회 문턱을 넘는 분위기였다. 국회 재정위원회 조세소위에서 여야가 K칩스법 통과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2·3 계엄’ 사태와 이어진 탄핵 정국으로 국회가 비정상적으로 운영되면서 법안은 두 달 넘게 잠자고 있다.

K칩스법이 표류하면서 반도체 기업들의 투자 불확실성은 높아졌다. 받기로 한 돈이 안 들어올 가능성이 커지다 보니 올해 투자 계획조차 확정하지 못했다. 지난해 반도체 부문에 46조3000억원 규모 시설 투자를 집행한 삼성전자가 그렇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31일 열린 콘퍼런스콜에서 이례적으로 “메모리 반도체 투자는 전년과 비슷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세부적인 투자 계획을 확정하지 못했다”고 했다. K칩스법 국회 통과가 안 되면 2조3000억원 안팎의 추가 세금 인센티브(지난해 수준 투자 가정)가 사라질 수 있어서다.

안 그래도 한국 반도체업계는 코너에 몰린 상황이다.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 등 중국 기업이 정부 지원금을 바탕으로 저가 공세를 펼친 탓에 범용 반도체 가격이 계속 떨어지고 있고,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에선 대만 TSMC와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다른 나라처럼 한국도 우리 반도체 업체들을 지원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나온 게 K칩스법과 반도체특별법인데, 무엇 하나 제대로 굴러가는 게 없다.

업계에선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을 둘러싼 더불어민주당의 ‘오락가락’ 행보를 볼 때, K칩스법도 비슷한 신세가 될 것으로 걱정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여야가 조기 대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정책 경쟁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K칩스법 통과를 위해 뛰는 건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른 ‘한국 반도체 지원’ 이슈를 선점할 좋은 카드임에 틀림없다.

지금 국회에선 여·야·정 국정협의체 가동을 위한 실무 협의가 진행 중이다. 정치권이 뜻을 모아 한국의 ‘기둥산업’ 살리기에 나설지, 이번에도 정쟁에만 골몰해 뒷전으로 밀어 넣을지 온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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