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정책은 10년 전부터 진행됐지만 아직 시작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도쿄에서 만난 일본증권거래소(JPX) 관계자는 일본의 밸류업 정책에 대해 갈 길이 멀다고 했다. 닛케이지수는 2019년 이후 두 배 넘게 올라 지난해 2월 버블경제 시기의 고점을 34년 만에 갈아치웠다. 이 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1시간 넘게 이어진 인터뷰에서 ‘성공’이란 단어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일본인 특유의 겸손함 때문이 아니다. 그는 “밸류업은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는 정책”이라며 “한국도 성과가 나오기까지 최소 4~5년, 아니면 그 이상이 걸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일본의 기업가치 제고 정책이 중장기 프로젝트인 건 가이드라인 제시, 즉 권고사항이기 때문이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 등 법을 통한 급진적 개혁을 추진 중인 한국과 결이 다르다.
지키지 않아도 불이익이 없는 정책을 상장사들은 왜 따르는 걸까. JPX 측은 사회적 합의 때문이라고 했다. 아베 신조부터 기시다 후미오, 이시바 시게루에 이르기까지 3대 총리에 걸쳐 일관된 정책을 추진한 결과 지나치게 많은 현금을 쌓아두거나 주주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인식이 기업들 사이에 뿌리내렸다.
거래소의 가이드라인을 따르면 결국 주가가 오른다는 ‘경험론’도 자리 잡았다. 일본 정부는 기업이 선제 투자에 나서도록 금융·세제 지원을 펼쳤고 ‘신(新)소액투자비과세제도’(NISA)라는 연금 제도를 통해 노후 자금이 증시를 떠받치도록 선순환 구조를 구축했다. 이 모든 일에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증시 정책이 아베 총리의 경제 정책과 비슷하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양국의 밸류업 정책은 속도와 방법론에서 큰 차이가 있다. 권고와 법이라는 단어의 무게감이 다르기 때문이다. 법은 즉각적이며 예외가 없다. 자사주 보유를 금지하고 소각을 의무화하면 기업은 행동주의 펀드 등 외부 공격에 그대로 노출된다. 2000년대 소버린이 SK그룹을 공격했을 때처럼 외국 투기자본의 경영권 개입 시도를 막아낼 방법이 없다.
한국 정부와 정치권이 롤모델로 삼고 있는 일본이 답답할 정도로 느리고 신중하게 정책을 추진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투기자본과 증시 거품이 어떤 파멸적 결과를 초래하는지 그들은 ‘잃어버린 30년’을 통해 뼈저린 교훈을 얻었다. 일본의 겉으로 드러난 성공보다 신중한 보폭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