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호수 위의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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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2025.02.05 17:05 수정2025.02.05 17:05 지면A31

1934년 1월 17일자 일본 일간 시사신보에 ‘반초카이(番町會)를 폭로한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대서특필됐다. 도쿄주식거래소 이사장과 일본상공회의소 소장을 역임한 고세이 노스케를 중심으로 한 기업인 모임인 반초카이가 당시 일본 상공대신, 철도대신과 결탁해 섬유회사 제국인견의 주가를 조작해 큰 이익을 봤다는 내용이었다. 사이토 마코토 내각이 총사퇴하는 등 정경유착 스캔들이 미친 후폭풍은 거셌다.

[천자칼럼] '호수 위의 달'

265회의 공판 끝에 1937년 10월 반전이 일어났다. 후일 일본최고재판소장이 되는 이시다 가즈토 판사가 사건 관계자 16명 전원에게 무죄판결을 내린 것. 고문까지 해가며 얻은 ‘자백’의 허위성을 지적한 이시다 판사는 “물속의 달그림자를 잡으려 하는 것과 같다”는 판결문을 남겼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범죄 혐의는 ‘공중누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 이 문구는 요즘도 일본 드라마 대사에 등장할 정도로 일본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됐다. 무엇보다 이 판결은 “법 해석이 세론에 휩쓸리면 위험하다”(미야케 마사타로 전 일본 사법차관)는 말로 대변되는 ‘진중한’ 일본 사법 문화를 이끈 계기로 평가된다.

그제 윤석열 대통령이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변론기일에 출석해 계엄 선포 당일 정치인 체포 의혹을 두고 “호수 위에 떠 있는 달그림자를 쫓는 듯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평소 투박하고 직설적인 화법을 애용하는 윤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시적인 비유를 들었기에 주목받았다. 검찰총장까지 지낸 법조인 출신으로 ‘내란은 실체 없는 허상’이라거나 ‘여론에 휘둘리지 말고 법리에 근거해 판결해달라’는 심경을 일본 사법사의 한 장면을 빌려 전한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자체가 ‘호수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가 물에 빠진 꼴일 수도 있다. 국가전복세력 타도를 앞세웠지만 그 실체를 둘러싼 논란은 진영별로 크게 엇갈린다. 냉정한 성찰은 정치권과 사법부에도 필요하다. 탄핵 정국에서 증폭된 사회 혼란과 사법부 불신은 법 규정과 절차를 거치지 않은 탓이 적지 않다. 속도전을 위해 조바심을 내거나 졸속으로 일관하다간 낭패를 볼 수 있다.

김동욱 논설위원 kimd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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