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쨍하고 해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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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2025.02.07 17:31 수정2025.02.07 17:31 지면A23

무명의 트로트 가수로 가난의 설움을 곱씹어야 했던 송대관은 1975년 ‘해뜰날’을 발표하며 그야말로 ‘쨍’하고 떴다. 노래 한 곡으로 인생 역전에 성공했다. 이 노래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할 수 있었던 건 당시 시대상이 제대로 투영됐기 때문이다. 경쾌한 멜로디도 좋았지만, 특히 가사의 한 구절 한 구절이 서민의 마음을 움직였다.

[천자칼럼] 쨍하고 해뜰날

“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모두 비켜라. 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송대관이 직접 지은 가사는 기본적으로 삶의 고단함과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의지를 함께 담고 있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등의 시대적 격문과도 맞닿아 있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우리 경제의 고속성장은 1970년대 들어서며 제동이 걸렸다. 당시 박정희 정부가 한계에 부딪힌 경공업 대신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경제구조 전환에 나선 이유다. 여기에 중동전쟁 발발로 오일쇼크까지 덮쳤다.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나 도시로 몰린 사람들의 삶도 팍팍해질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으로도 반(反)유신 운동이 거세진 어려운 시기였다. 좌절과 희망이 혼재된 시대를 살던 사람들에게 ‘해뜰날’은 위로인 동시에 격려이기도 했다.

노래가 뜬 뒤 송대관은 어머니와 함께 방바닥에 1만원짜리 지폐를 잔뜩 깔고 잤다고 한다. 돈이 없어 아픈 어머니가 제대로 치료를 못 받은 것이 한이 됐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인생이 계속 승승장구한 것은 아니다. 트로트 침체기가 찾아온 탓에 고생하다가 미국으로 떠나 긴 공백이 있었다. 10년 만에 귀국해 잇따라 히트곡을 내며 전성기 못지않은 인기를 얻었지만, 투자 실패 등으로 어려움도 겪었다.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차에서 쪽잠을 자가며 노래해 거액의 빚을 대부분 갚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마음에 와닿은 노래를 들려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최근까지도 마이크를 놓지 않았던 그가 갑작스럽게 유명을 달리했다. 많은 이들을 위로한 그에게 팬들 대신 감사를 전한다. “당신의 노래 덕에 힘든 시절을 이겨냈습니다.”

김정태 논설위원 inu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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