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6월 28일 프랑스 파리 외곽에 있는 베르사유궁전 거울의 방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매듭짓는 ‘베르사유 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으로 패전국 독일은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돌려주고 단치히(폴란드명 그단스크)를 폴란드에 넘기는 등 영토의 15%와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700만 명의 국민을 잃었다. 추가 협상 끝에 확정된 1320억골드마르크(2025년 기준 환산액 6050억달러)에 달하는 전쟁배상금은 독일에 결정적인 타격을 줬다.
경제학자 존 케인스가 ‘카르타고 방식 평화’(적국의 완전한 굴복)를 구현한 수단이라고 비꼬은 막대한 규모의 배상금은 새로운 분쟁의 씨앗이 됐다. 배상금 지급 부담 때문에 경제가 파탄을 맞는 모습을 보면서 생긴 ‘국민적 굴욕감’을 발판 삼아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이 부상했다. 베르사유 조약은 갚는 것이 불가능한 채무를 매몰차게 강요한 연합국의 승자독식과 독일이 느낀 패배감과 절망, 복수심을 상징하는 단어가 됐다.
낡은 역사책의 한구석에 숨어 있던 ‘베르사유 조약’이라는 용어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협상이 가시화하면서 다시 등장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우크라이나 정부에 제시한 ‘재건투자기금 협정’ 초안에서 “지금까지 미국으로부터 받은 군사 지원 등의 대가로 5000억달러(약 722조원)를 갚으라”고 요구했다. 구체적인 수단으로 우크라이나가 자원 채굴로 얻는 수입의 50%를 미국이 챙기겠다는 내용도 담겼다. 미국이 적대국도 아닌 우크라이나에 요구한 액수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율로 살펴볼 때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이 졌던 것보다 부담이 더 크다.
전후 질서를 짜는 작업이 구체화하면서 전쟁보다 더 잔인하고 다면적인 ‘정치’가 본격화했다. 빈사 상태인 나라에 거리낌 없이 ‘청구서’부터 내미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당사국인 우크라이나가 배제된 채 미국과 러시아가 종전 협상을 주도하는 힘의 논리는 어떤 모습으로 ‘잔혹한 얼굴’을 드러낼지 알 수 없다. 나를 지키는 것은 나의 힘밖에 없다는 냉혹한 진리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김동욱 논설위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