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적인 건강보험 저수가 탓에 최신 의료기기와 혁신 의료기술 도입이 기약 없이 지연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일 의료기기업계에 따르면 미국과 유럽에서 널리 쓰이는 암환자용 탄소섬유 척추나사못이 국내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나사못은 척추뼈로 전이된 암세포 조직을 들어내고 남은 척추뼈를 고정하는 데 사용한다. 국내에서는 20년 전 출시된 티타늄 척추나사못이 건강보험 수가를 적용받아 쓰이고 있다. 하지만 이 못을 사용하면 티타늄 금속이 자기공명영상(MRI), 컴퓨터단층촬영(CT) 검사나 방사선 치료를 할 때 간섭현상을 일으킨다. 김영훈 서울성모병원 정형외과 교수는 “탄소섬유 나사못이 암 검사를 방해하지 않고 방사선 항암 치료 효과를 높이는데도 건보 저수가 때문에 국내외 기업들이 한국에는 공급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과 유럽, 호주에서 대중화한 척추수술 로봇도 한국에서는 정부 시범사업 외에 정식으로 도입한 병원이 없다. 척추디스크, 척추측만증 등이 있는 환자에게 필요한 척추유합술에 이 로봇을 활용하면 절개를 최소화할 수 있어 수술 후 회복이 30%가량 빨라지지만 역시 건보 저수가가 걸림돌이 되고 있다.
재사용 금지된 수술용 드릴날, 수가 맞추려 4~5번 쓴다
한국에 없는 첨단 의료기기, 저품질 치료재료에 의존
첨단 의료기기가 건강보험 저수가 때문에 제대로 도입되지 못하면서 국내 의료 서비스의 경쟁력 약화가 우려되고 있다. 치료 효과가 떨어지고 각종 부작용이 우려되는 저가의 저품질 의료기기가 의료 현장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환자들은 고품질 의료 서비스를 받을 기회를 놓치고, 의료산업도 제대로 발전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 혁신의료기기 도입, 美 10분의 1 수준
2일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 따르면 2021년부터 2023년까지 국내에서 3년간 인공지능(AI)이나 로봇 등 혁신 기술을 적용한 혁신의료기기로 지정받은 의료기기는 48개다. 같은 기간 미국은 517개, 중국은 199개였다.
허리 통증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엉치엉덩이 관절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임플란트는 국내에 도입되지 않았다. 토머스 시모풀로스 미국 하버드대 의대 교수 논문에 따르면 만성요통 환자의 25%가량이 엉치엉덩이 관절에 문제가 있고, 이를 고정해주는 임플란트를 사용하면 큰 수술 없이 간단한 시술만으로 통증이 완화된다. 한 신경외과 의사는 “국내엔 관련 임플란트가 없어 환자가 복잡하고 큰 수술을 받아야 한다”며 “시술 대신 큰 수술을 하면 아무래도 회복에 오랜 시일이 걸린다”고 지적했다. 대한척추외과학회, 대한척추신경외과학회 의료진은 엉치엉덩이 관절 고정술에 대한 적절한 수가가 필요하다고 호소하지만 상황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이 임플란트를 생산하는 글로벌 의료기기 업체들은 미국 대비 100분의 1 수준에 불과한 수가를 적용받는 한국에선 판매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 저렴한 동유럽산 뼈이식재 장악
사체에서 추출한 뼈이식재(동종골)의 품질 문제도 불거지고 있다. 동종골은 골절로 인해 수술할 때 뼈를 붙이고 부족한 뼈를 채우기 위해 쓰인다. 보통 뼈가 안전하게 잘 붙게 하기 위해선 미국산 동종골을 써야 하지만 한국에선 저수가의 벽에 부딪혀 동유럽산 동종골을 쓰는 사례가 많다. 국내 한 의료기기 업체 대표는 “미국은 사망자의 사인과 감염 및 질환 여부를 정확하게 파악해 우량 동종골만 추출하지만 동유럽산은 이런 이력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사례가 많다”며 “이력 관리가 안 된 동종골을 이식받는 것은 환자 입장에선 리스크”라고 말했다.
미국과 유럽에서 정형외과·신경외과 수술 시 광범위하게 쓰이는 이동형 3차원(3D) 엑스레이 역시 국내에선 도입한 병원이 거의 없다. 수입업체들이 저수가 때문에 국내 공급을 대부분 포기했기 때문이다. 이동형 3D 엑스레이를 활용하면 보다 정밀한 수술이 가능하다. 수술 과정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어 수술 부작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
◇ 일회용도 재사용해 감염 우려
저수가 정책은 의료 현장의 안전 문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재사용이 금지된 일회용 의료기기를 재사용하는 게 대표적 사례다. 뼈가 부러지는 골절상, 척추수술, 뇌수술 시 쓰이는 외과 수술용 드릴날은 일회용 사용이 원칙이다. 하지만 대다수 병원에선 재사용하는 사례가 많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정액수가(분할수가) 품목으로 지정해 제품 전체 수가의 20%만 반영한 탓이다. 산술적으로 다섯 번 사용해야 전체 수가를 받을 수 있는 셈이다. 한 병원 관계자는 “미국과 유럽 모두 일회용 드릴날은 한 번 쓰고 버리는 것이 상식이지만 한국은 대다수 병원에서 드릴날을 소독한 후 여러 차례 재사용한다”고 전했다. 드릴날을 여러 환자를 상대로 쓰면 교차 감염 우려가 있는 데다 재사용으로 날이 무뎌지면 정밀하게 뼈를 깎아내지 못해 수술 결과가 나빠질 수 있다.
안대규/오현아 기자 powerzani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