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표 배우가 총출동한 드라마로 유명한 ‘관료들의 여름’은 1950년대 일본 경제를 부활시키려는 통상산업성(현 경제산업성) 관료들의 분투를 그렸다. 주인공인 자동차과장은 일본의 모든 가정이 승용차 한 대씩을 보유하는 ‘국민차 구상’을 실현하기 의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도로 포장률이 5%에 불과하고 차 한 대 값이 집 한 채 값인 나라에서 무슨 국민차 시대냐’는 대장성(현 재무성)의 반발을 무너뜨리려 언론에 기사를 흘려 여론전을 펼치는 것은 기본이고 집권당 고위 간부를 끌어들여 대장성을 대신 설득시키는 술수에도 능하다. 이들이 있어 일본은 1960년대 고도성장기를 거쳐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부활했다.
견제·균형으로 반도체 살리는 日
지금도 일본 언론들은 재무성과 경제산업성의 관계를 곧잘 ‘전통의 라이벌’로 표현한다. 최근에는 반도체산업 지원을 놓고 라이벌전이 불꽃 튀었다.
2021년 경제산업성은 “일본의 반도체 점유율이 2030년 ‘제로(0)’가 될 것”이란 보고서를 발표했다. 다른 건 몰라도 기술력 하나만큼은 여전히 일본이 세계 ‘넘버 원’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일본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여론을 등에 업은 경제산업성은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를 설립하고 막대한 재정 지원을 쏟아부을 수 있었다. ‘반도체 지원용 국채’를 발행하고, 출자와 채무보증까지 설 수 있도록 법을 만들었다.
재무성은 지난 3년간 국내총생산(GDP) 대비 일본 정부의 반도체산업 지원 금액(3조9000억엔)이 0.71%로 미국과 프랑스(0.2%), 독일(0.4%)의 2~3배에 달한다는 통계로 반격했다. 경제산업성의 질주로 반도체산업에 파격적인 지원을 할 수 있었다면, 재무성의 견제 덕분에 과도한 지원에는 조금씩 거품이 빠지는 모습이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글로벌 통상질서가 통째로 바뀌고 있다. 자연스럽게 각국의 산업정책과 에너지정책도 대전환기를 맡았다. 산업·에너지·통상정책의 변화라는 3각 파도를 제대로 넘지 못하는 국가는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란 점은 자명하다.
산업부, 준비 돼 있나
우리나라에서 산업정책과 자원·에너지, 통상을 모두 담당하는 정부 부처가 산업통상자원부다. 앞으로 20~30년간 한국 경제의 방향타가 산업부에 쥐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산업부의 분위기는 의욕에 불타고 있다고 말하기 힘들다. 오히려 예산은 기획재정부, 정보는 민간 대기업, 규제 권한은 경쟁 부처들이 쥐고 있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3무(無)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
기자가 만난 전직 산업부 장차관들은 안타까워하면서도 일침을 잊지 않았다. “산업부가 언제 힘 있는 부처였던 적이 있나. 이럴 때일수록 기업인들을 많이 만나고, 현장 밀착형 정책을 개발해 기획재정부와 관련 부처를 설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가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경공업→중화학공업→첨단산업’으로 체질을 바꿔가며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데는 산업부 관료들의 역할이 컸다.
좋든 싫든 이제 다시 산업부의 시간이 왔다. 올해 산업부가 ‘관료들의 여름’처럼 뜨겁게 불타오르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