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52시간제 문제는 긴 산업의 흐름에서 별것 아닐 수도 있다. 더불어민주당 말대로 52시간제 때문에 삼성 반도체가 위기에 빠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천하의 인텔까지 흔들릴 정도의 산업 격변기다. 반도체, 그것도 연구개발(R&D)이라는 업종에 한해 예외를 두자고 하는데 한사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인공지능(AI) 시대에 이런 문제로 소모적 정쟁을 벌이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반대론자들은 산업계를 또다시 장기 노동으로 밀어 넣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거짓 선동이다. 특수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규제를 배제한다고 밤샘 근무가 일상화될 리 없다. 요즘 세상에 그런 지시를 강제할 기업도, 순순히 따를 직원들도 없다. 인간은 누구나 적게 일하고 많이 벌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리 중에 누군가는 60시간 넘게 일해야 빠듯하게 가정을 꾸리는가 하면 누군가는 그런 일자리마저 구하지 못해 발을 구른다.
같은 시간을 일해도 보상은 천차만별이다. 서울과 뉴욕의 엔지니어 소득은 같을 수가 없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철 지난 노동가치설에 입각한 사회적 분배 논리일 뿐, 가만히 살펴보면 동일노동이라는 것은 없다. 무엇보다 시장이 다르고 사람의 자질과 교육 수준도 제각각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주 30시간만 일해도 수억원대 연봉을 받는다. 그런 인재를 구하고 싶어도 못 구하는 나라도 부지기수다. 한국도 그중 하나다. 주 52시간제는 시장의 이 모든 복잡성과 다양성을 거두절미하고 잘라버린다. 어떤 경우든 52시간을 넘기지 마라. 이것만이 지상명령이다. 이렇게 무지막지한 폭력이 없다. 여기에 해고는 원천 불가다. 정년은 법제화돼 있다. 이런 경직성이 한국 노동시장의 균형을 완전히 무너뜨렸고 만성적인 이중구조를 만들었다.
우리는 제조업의 나라다. 근로자 숫자와 근로시간이 나라 전체의 노동생산성을 결정하는 구조다. 근로자들이 열심히 일한 덕분에 1964년 100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이 지난해 3만6000달러대로 높아진 것은 맞다. 하지만 노동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소득은 생산성의 함수다. 소득이 360배 늘었다면 생산성도 그만큼 증가한 것이다. 육체노동만으론 불가능하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북한이 저 모양 저 꼴로 살지는 않을 터다.
기업 자본의 엄청난 설비투자가 생산성의 질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건설 현장의 중장비 한 대가 근로자 100명을 이기는 경제를 만들었다. 전 세계 어떤 제조업보다 빠르고 정확한 납기를 자랑할 수 있게 됐다. 제법 먹고살 만해졌으니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은 온당하다. 주 4일 아니라 주 3일 체제도 당연히 환영한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제대로 작동하면 노동의 지상천국을 기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계가 엄연하고 뚜렷하다. 일자리가 견디고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 기업이 죽으면 주 52시간제도 자동 소멸된다. 모든 노동권이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한국 기업들은 애플, 엔비디아, 테슬라, BYD, 화웨이, 샤오미라는 글로벌 기업 군단을 돌파해야 한다. 이들에겐 우리처럼 거추장스러운 규제가 없다. 돌아서서 웃고 있을 것이다. 더 이상 퇴로는 없다.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주 52시간제 완화를 쉽게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는 지지층의 완강한 저항과 먹사니즘 구호 사이에 딱 끼었다. 근로시간이라는 역린(逆鱗)을 잘못 건드리면 진영 전체가 돌아설 수도 있다. 차기 대권을 노리는 그로서는 엄청난 정치적 모험이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얻으려면 낡은 것을 버려야 한다. 이제 와서 사회적 타협 운운하는 것은 하지 말자는 것과 다를 바 없다. 52시간 문제는 대한민국이 미래 생존을 위해 유연성과 포용력을 발휘할 수 있느냐를 가늠하는 시금석이다. 이 정도도 해결하지 못하는 사회는 정상적이지 않다. 노동계의 이념적 역린으로 국민 모두를 규제해서는 안 된다. 개개인은 작은 기득권에 연연할지 몰라도 국민 총화는 국가의 미래를 염려하고 후대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한다. 미래 지향적 지도자로서 스스로 변화하고 혁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누구든 정치적 장래를 기약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