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생로병사에서 사모펀드는 일종의 막장이다. 기업 생존과 유지에 목숨을 건 무한책임 사원이 없기 때문이다. 법정관리로 파탄 난 홈플러스의 대주주 MBK는 끝내 증자를 하지 않았다. 홈플러스의 법적 주인이었으되, 주인의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사모펀드의 최우선적 목표는 투자금의 안전한 회수다. 남의 돈을 굴리는 펀드 성격상 유한책임 사원에 머물 수밖에 없다.
일반적 기업 대주주는 무한 책임을 진다. 자금난이 닥치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자본을 보강하고 부채를 일으킨다. 유상증자는 최후의 카드는 아니지만, 가장 경제적인 자본 조달 수단이다. 은행 차입이나 회사채 발행은 한도가 있다. 반면 증자는 추가 신용보강으로 차입 여력까지 늘릴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증자 결행의 궁극적 부담은 대주주가 진다. 스스로 가장 큰돈을 내야 할 뿐만 아니라 소수·소액주주들이 남긴 실권주 대책도 세워야 한다. 재무 사정이 나빠졌는데도 대주주 증자 여력이 없는 기업은 막장으로 진입한다. 잘되면 사모펀드, 잘못되면 법원으로 직행하는 운명이다.
무한투자의 시대다. 인공지능(AI) 로봇 반도체 전기자동차 배터리 등의 신산업은 100조, 200조원의 천문학적 투자를 동반한다. 소프트뱅크 같은 기업들이 한 번 움직이면 수십조, 수백조원짜리 투자 발표가 쏟아진다. 한국 자본시장은 기로에 섰다. 미래 신산업을 위한 인프라 건설은 기존 제조업보다 ‘0’이 한두 개 더 붙는 돈을 필요로 한다. 빅테크들이 100조원 투자할 때 우리도 최소 10조원은 따라붙어야 한다. 배터리회사 SK온은 지난 2~3년 사이 모회사(이노베이션) 유상증자와 사모펀드 출자, 알짜 계열사 합병 등을 통해 박박 긁어모은 돈을 모두 국내외 공장 건설에 쏟아부었다. 전기차 캐즘을 극복하기 위한 필사적 몸부림이다. 지금 여기서 멈추면 30조원 넘게 들인 기존 투자가 모두 무위로 돌아간다. 삼성SDI도 1998년 이후 27년 만에 유상증자(2조원)를 결정했다. 자본력을 보강하지 않으면 다가오는 대규모 투자를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이다. 두 회사보다 실적과 재무 상태가 좋은 LG에너지솔루션도 연초 1조6000억원 상당의 회사채를 발행했다. 시장은 죽느냐, 사느냐의 처절한 전장이다. 이미 유럽 최대 배터리 기업 노스볼트가 파산을 선언한 상태다. 중국 정부의 ‘전기차 굴기’로 급성장한 CATL과 BYD는 한국 배터리 3사를 정조준하고 있다.
AI 시대는 모든 산업을 ‘리셋’하면서 다가온다. 기술력 못지않게 재무적 준비가 탄탄해야 한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SK하이닉스가 비록 큰돈을 벌고 있지만 앞으로 용인클러스터에 쏟아부을 돈만 120조원이다. 투자 발표 이후 튀어 오른 건설비 등을 감안하면 200조원이 소요될 수도 있다. 우리는 그 많은 돈을 어디서 구해야 하나. 은행 차입, 회사채 발행이 목전에 찼다면 증자밖에 없다. 기업들 자금줄이 끊어진 IMF(국제통화기금) 사태 때도 그랬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를 포함해 유상증자를 하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 증자는 오히려 호재였다. 반드시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의지로 받아들여졌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 시장은 유상증자에 더 이상 관대하지 않다. 방산 조선 등에 대한 미래 투자를 위해 증자를 발표한 한화에어로스페이스 같은 기업들이 소액주주와 금융당국 등쌀에 쩔쩔매고 있다. 왜 하필 내가 주식을 보유한 시점에 증자를 하느냐고 불만이다. 하지만 은행 같은 배당주가 아닌 성장주에 대한 투자는 불확실성을 견디는 인내를 필요로 한다. 주식이 왜 위험자산이겠나. 성장으로 가는 길은 결코 안전하지 않다. 때로는 울퉁불퉁하고 때로는 균열과 붕괴가 잇따른다. 도중에 유상증자와 배당 축소 같은 고통도 견뎌야 한다. 증자 자체로 미래를 보장받는 것도 아니다.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2등이 가장 크게 망하는 포커 게임처럼 베팅을 거듭할수록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이런 모험이 싫은 투자자들은 성장주를 줄여야 한다. 첨단산업 전쟁의 포연이 걷히고 나면 우리 주력 기업들의 몇몇이 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자본을 제대로 보강하지 않으면 더 많은 기업이 막장에 내몰릴 것이다. ‘증자하면 죽일 놈’ 되는 시장에선 성장도, 혁신도, 밸류업도 모두 가망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