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기고]디자인으로 만드는 '청년이 모이는 산업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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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흠 한국디자인진흥원장윤상흠 한국디자인진흥원장

OECD 파견으로 프랑스에 머무르던 시절, 한국과는 사뭇 다른 신호등 위치가 인상 깊었다. 신호등이 교차로 위가 아닌 정지선 바로 앞, 횡단보도 전에 설치돼 있어 운전자가 신호를 확인하려면 반드시 정지선 뒤에 멈춰야 한다. 별도의 경고 없이도 운전자 행동을 자연스럽게 유도해 신호 위반을 줄이고 사고를 예방한다. 이것이 바로 디자인 싱킹(Design Thinking)이다.

디자인 싱킹은 사용자의 수요와 인지, 행동을 관찰하는 데서 출발한다. 기존 현상을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시선에서 분석하고 창의적으로 재해석하며, 반복 실험을 거쳐 최적의 대안을 찾는다. 이는 시간과 비용을 줄이고 더 나은 선택을 이끌어내는 과정이다.

한국디자인진흥원은 이러한 디자인 싱킹을 활용해 2014년부터 행정안전부와 함께 국민디자인단을 운영해왔다. 스쿨존 교통안전, 치매안심 울타리, 화재 트라우마 대응 등 생활 속 사회문제 해결에 디자인 기법을 적용하며 12년간 2000여건의 실험과 성과를 축적해왔다.

더불어 산업안전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며 2021년부터 국내 산업단지 내 기업을 지원하고 있는 '안전서비스디자인사업'은 디자인이 적용된 정책이 어떤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노동자와 현장을 중심으로 행동, 요구사항, 제약조건 등에서 발생하는 모든 안전 문제를 직관적이고 지속가능한 해결책으로 제시한 결과, 모든 참여 기업에서 산업재해 0건, 노동자 만족도 90점이라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이러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이번에는 청년이 모여드는 산업단지에 도전한다. '청년 디자인 리빙랩'은 문화가 있는 산업단지 조성을 목표로, 노후하고 획일적인 공간을 청년이 배우고 머무는 창의적 생활터이자 지역 주민이 찾는 거점으로 바꾸려는 시도다. 초기 기획 단계부터 노동자와 그 가족, 지역 주민, 방문객 등 수요자가 참여해 공간의 쓰임을 재정의하고 청년과 지역의 요구에 기반해 설계가 이뤄진다.

정해진 시계가 아닌 각자의 리듬으로 작동하는 '나만의 시간표 공장', 회의실이나 휴게실 같은 유휴 공간과 자원을 여러 기업이 함께 공유하는 '산단 속 교환소' 같은 상상도 청년의 열정이 깃든 산업단지 전환의 시작이 될 수 있다.

해외에서도 유사한 시도가 있었다. 싱가포르 '원 노스(One-North)'는 과학·바이오·정보통신기술(ICT) 산업이 집약된 기술혁신 클러스터로 업무·주거·여가가 통합된 사용자 중심 도시로 조성됐다. 이 안의 '블록71(Blk71)'은 1970년대 노후 공장을 창업 허브로 재탄생시킨 사례다. 실제 입주자들의 피드백과 요구를 반영한 모듈형 사무실, 공동 실험실, 네트워킹 공간 등 사용자 중심의 설계가 창업자와 기업을 끌어들이는 동력이 됐다.

이처럼 디자인은 실행의 마무리가 아니라, 문제를 재정의하고 해법을 구성하는 기획의 언어이자 전략이다. 수요자 중심의 탐색과 실험, 반복의 구조가 정책 설계에 녹아들 때 공공정책은 더욱 정밀하고 체계 있게 작동하게 된다.

디자인은 보이지 않던 정책과 서비스를 눈에 보이게 만들고, 일상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새로운 방식이 될 수 있다. 디자인의 창의성과 새로운 세대의 열정이 더해질 때, 산업단지는 다시 우뚝 설 수 있다.

윤상흠 한국디자인진흥원장 syoon@kidp.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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