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이 곧 음식맛… 기다림의 음식, 한식[권대영의 K푸드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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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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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영 한식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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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음식은 절대 권력이나 부르주아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일본 음식은 메이지 유신 이후 국민 개혁과 산업적인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우리 음식은 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 한식은 국토의 지리적 풍토와 농업적인 환경에서 가족을 먹여 살리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와 조상들의 지혜가 쌓여 자리를 잡은 음식이다. 민족과 함께 밑에서부터 진화와 발전을 거듭해 온 것이다. 한식의 인문학은 위에서부터 내려온 프랑스나 일본 음식과는 확연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서양 음식의 ‘소스’에 해당하는 우리말이 ‘장’이다. 이 장을 이용해 음식을 맛있게 먹으려고 개발한 것이 ‘양념’이다. 이 장과 양념이 만나 새로이 탄생한 것이 김치와 된장, 간장, 고추장이다. 장과 김치는 정성을 들여 담근 다음에 오랜 발효 과정을 거쳐야만 맛있는 음식이 된다. 그 발효 과정은 창조와 개발이 아닌 오랫동안 기다리고 터득한 지혜에 의한 진화의 산물이다. 장의 발효는 미생물에 의해 콩에서 메주가 되기까지, 그리고 장을 담근 후 아미노산 펩타이드가 만들어지기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 이뤄진다. 우리 조상들은 미생물이나 발효라는 과학 지식은 알지 못했지만 어떻게 하면 맛있는 음식이 생기는지에 대해선 대대로 내려오는 지혜를 통해 알았다.

우리 음식의 맛은 장맛에 의해 결정되고, 김치가 맛있으면 밥맛도 좋다. 우리 속담에 ‘그 집의 장맛을 보면 그 집안의 음식맛을 알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프랑스 미식가 장 앙텔름 브리야사바랭이 “그가 무엇을 먹는지 알려주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줄 수 있다”고 말한 것과 맥락이 통한다. 브리야사바랭이 음식으로 인격을 알 수 있다 했지만 우리나라는 장맛으로 그 집안을 알 수 있다 한 것은 관점만 다를 뿐이다. 문화적 차이다.

한식을 이야기할 때 항상 부딪치는 것이 중국 음식과의 관계다. 우리나라는 영토적으로 중국과 가깝기는 하지만 민족, 지리, 풍토, 언어적으로는 매우 다르다. 역사적으로 음식과 언어에선 중국과 수평 관계에 있다. 구석기 이후 수렵 채집의 시기에서 농경시대로 넘어오는 과정이 중국과 달랐다. 고조선 영토에 뿌리를 둔 나라는 중국처럼 풍부한 기름이 나지 않았으며 먹을 것도 풍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인도처럼 다양한 향신료도 나지 않았다. 독자적으로 콩이 우리나라 원산지로, 벼가 단립종으로 자라고 있었고 산과 들에는 각종 풀이 푸성귀로, 마늘, 파, 고추 등이 향신료로 자라고 있었다. 우리 음식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 중국 음식문화의 틀로 우리 음식을 보려는 것은 진실로 다가가는 데 한계가 있다.

우리 음식의 뿌리는 자연과 발효다. 아주 오묘한 과정인 발효 과학이 우리 음식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맛있는 발효의 맛은 오래 기다려야 했다. 우리 조상들은 장과 김치를 정성 들여 담그고 때를 기다려 왔다. 마치 어머니가 사냥 나간 지아비가, 길 떠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것같이. 그리고 지아비와 아들이 돌아오면 함께 맛있게 먹을 것을 꿈꾸며, 정성 들여 맛있는 음식을 만들며 만남을 기다렸다. 누구와의 만남을 기다리면서 음식을 만드는가와 누구와 음식을 나누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기다림과 만남, 한식의 인문학이다.

권대영 한식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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