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아웃] 여성이 이끈 프로야구 천만 관중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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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확대 잠실구장 가득 메운 프로야구 관중들

잠실구장 가득 메운 프로야구 관중들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김종우 선임기자 = 20년 전만 해도 야구장은 퇴근 후 넥타이를 느슨하게 늘어뜨린 직장인들이 치킨과 맥주를 앞에 두고 큰소리로 응원과 야유를 보내던 곳이었다. 중년 남성들이 하루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성역'과도 같았다. 하지만 지금 야구장은 다른 세상이 됐다. 분홍 유니폼을 차려입은 20대 여성들이 "파이팅"을 외치고, 유모차를 끄는 젊은 부부가 아이와 함께 야구를 즐긴다. 마스코트와 셀카를 찍으려는 초등학생들도 적지 않다. 이 같은 현상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 야구가 금메달을 따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한국야구위원회(KBO) 등에 따르면, 2024년 상반기 기준 전체 티켓 구매자 중 여성 비율은 54.4%로 절반을 훌쩍 넘겼다. 재미있는 점은 2024년 KBO 올스타전 예약자 중 20대 여성 비율이 39.6%로, 모든 성별·연령대 중 가장 높았다는 것이다. 과거 야구장에서 절대다수였던 40∼50대 아저씨들은 '라떼 얘기'가 됐다. 구단들도 변화의 물결을 놓치지 않았다. 가족석은 기본이고, 키즈존에 놀이시설까지 갖춰 놓았다. 유모차 전용 입구는 물론이고, 수유실과 기저귀갈이대까지 완비했다. 야구장은 이제 아빠의 스트레스 해소 공간에서 온 가족의 주말 나들이 코스로 탈바꿈했다.

여성 팬들은 야구를 소비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놓고 있다. 이들은 경기 결과에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선수 개개인의 매력 포인트를 찾아내고, 개인적인 스토리에 열광하며, 감성적 연결고리를 만들어낸다. 응원 콘텐츠를 제작해 유튜브와 틱톡에 올리고, 선수들의 하이라이트 영상을 편집해 공유한다. 인스타그램엔 수준급 팬아트가 넘쳐나고, 팬카페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생일파티와 응원 이벤트를 기획한다. "잘생긴 얼굴", "유쾌한 인터뷰", "팬서비스 센스" 같은 요소들이 경기력만큼이나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됐다. 프로야구 유무선 중계사업자가 지난해 3월 '미디어 플랫폼 개방'을 강조한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티빙'으로 바뀌면서 야구가 스포츠를 넘어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로 진화하고 있는 셈이다.

구단들의 마케팅 전략도 달라졌다. SSG는 '레이디스 데이'를 정기 이벤트로 만들어 여성 팬들을 위한 특별 혜택을 제공한다. NC는 마스코트 캐릭터 상품 라인을 확장해 '덕후 문화'를 겨냥했다. LG는 아예 여성 전용 유니폼을 별도로 출시했다. 티켓 정책도 세분화했다. 4인 가족 패키지부터 어린이 시즌권, 데이트족을 위한 커플 할인까지 다양한 선택지를 마련했다. 이런 변화는 관중 수를 늘리는 차원을 넘어선다. KBO리그 전체의 브랜드 이미지를 바꾸고, 선수들의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며, 야구라는 스포츠 자체의 사회적 위상을 끌어올리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여성 팬과 가족 관중,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있다. 거칠고 폐쇄적이던 응원 문화의 시대도 지나갔다. 이제 야구장은 누구나 편안하게 와서 추억을 만들고, 감동을 나누며,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찾는 공간이 됐다. 이 흐름이 계속된다면 KBO리그는 단순한 스포츠 리그를 넘어 우리 사회의 든든한 '문화 인프라'로 성장할 것이다. 야구장으로 향하는 길에 성별도, 나이도 상관없다. 야구를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충분하다.

jongwoo@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년06월11일 06시30분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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