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약사 제도는 1993년 한의사·약사 분쟁의 산물로 태어났다. 당시 의약분업과 한약 조제권을 둘러싼 의사·약사·한의사 간의 극심한 갈등 속에서 정부는 ‘한의학 의약분업’을 전제로 한약사 면허제도를 신설했다. ‘처방은 의사, 조제는 약사’로 규정한 의약분업처럼 한의사는 진단을, 한약사는 조제를 맡는 전문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 한방분업은커녕 한약사들은 갈 곳을 잃었다.
이는 정부가 제도를 만들어놓고는 정작 한약사가 전문성을 발휘할 터전은 닦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사이 일부 한약사들은 생존을 위해 일반 약국을 개설하고 약사를 고용해 처방 조제에 나섰다. 이에 대해 대한약사회는 면허 체계의 근간이 무너졌다며 분노하고 있다.
이 비극의 이면에는 보건복지부의 무책임한 행정이 자리 잡고 있다. 의약품정책과는 약사법상의 모호한 규정을 빌미로 한약사의 일반의약품 판매와 교차 고용 문제를 방관했다. 이에 한약사는 약사를 고용해 한의사가 아닌 의사의 처방에 대해 조제해 왔다. 또 복지부 한의약정책관실은 한의사 위주의 정책에만 몰두해 한약사라는 직능의 전문성을 외면했다. 각 부서가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사이 현장의 갈등은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치닫는 상황이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한약사 제도의 존폐를 포함한 직능 재설계에 나서야 한다. 한의약 분업을 당장 시행할 의지가 없다면, 이미 배출된 한약사들과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전향적인 보상책이나 직능 전환 지원 등의 ‘통 큰 해결책’이 필요하다. 한약사는 지금도 매년 120명씩 배출되고 있으며, 누적 인원은 3300여 명에 이른다.
당장 국민의 혼란을 줄이는 것도 시급하다. 국민은 내가 약을 사는 곳이 약국인지 한약국인지, 나에게 약을 주는 사람이 약사인지 한약사인지 명확히 알 권리가 있다. 현재 간판만으로는 한약국인지 약국인지 혼란스러운 경우가 많다. 이를 위해 약국과 한약국의 명칭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자신이 방문한 곳의 전문가가 누구인지 알 수 있도록 명칭 분리를 서둘러야 한다. 면허 범위에 따른 업무 가이드라인도 법적으로 구체화해야 한다. 한방 제제 분류가 미비하다는 핑계 뒤에 숨지 말고, 현재의 분류 체계 내에서 한약사가 취급할 수 있는 범위를 명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30년은 한 세대가 저무는 긴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정부의 방임 아래 약사와 한약사는 심하게 대립하고 있고, 국민의 건강권은 불확실성 속에 놓였다. 행동하고 실천하는 정부를 표방한다면, 이 비정상적인 갈등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정부의 결단만이 160일째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외치는 이들의 호소를 멈추게 할 수 있다.
이진한 의학전문기자 liked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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