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지인의 실화(實話)다. 그는 교외에 주택을 지었다. 그의 가치관처럼 이상적이었다. 특히 담벼락이 없어서 1층에서도 거실 전면 통유리창 멀리 흘러가는 강이 바로 앞에 있는 듯 보였다. 한데, 이 만족감이 무너지는 데는 일 년이 안 걸렸다. 한적하되 좋은 위치에 멋진 건축물이 들어서니, 사람들이 슬금슬금 모여들기 시작했다. 통유리창에 면상을 바싹 대고 집 안을 들여다보는 한 사내에게 그가 기겁을 한 건 시작에 불과했다.
이런 불청객들은 점점 늘어가고 양상도 다양했다. 그들은 그의 집 외관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쑥덕이고 몇은 “계세요?” 그러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심지어 몇은 그런 소리마저 안 냈다. 그들의 태도는 태연하거나 몽롱했다. 그가 항의하고 경고했지만, 뭐 이런 거 가지고 화를 내느냐는 식을 넘어서 욕까지 하고 가기도 했다. 타인의 천진한 접근과 악의 없는 적반하장이 그토록 고통스럽다는 걸 그는 난생처음 체감했다. 더 큰 문제는,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들이 끊길 기미가 없다는 거였다.
피로와 무서움은 극도의 불안으로 정착됐다. 결국 그는 설계도에는 없었던 담벼락과 대문을 그 주택에 만들었다. 상황은 호전됐지만, 담벼락을 넘어 누군가 침입했던 흔적이 있었다. 그가 CCTV를 설치하고 파출소, 사설 경비업체와 방범 시스템을 구축한 뒤에야 이전 같은 일들이 일소됐다. 하지만 그간 그 집은 외부에 ‘지나치게’ 알려져 버렸고 그는 공황장애를 얻었으며 무엇보다 자신이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지은 ‘꿈의 집’에 오만 정이 다 떨어져 버렸다. 급기야 그는 집을 부동산 중개소에 내놓았지만 그의 머릿속처럼 독특한 그 집은 헐값에도 팔리지 않아 애물단지로 남았다.
나 같은 386에게 스웨덴은 사회민주주의와 ‘소위’ 진보주의가 최상으로 실현된 이상향, 가장 개방적이면서 안전하고 평화로운 국가로 각인돼 있다. 그 스웨덴에서 총기범죄, 폭탄테러가 유고 내전을 치렀던 발칸반도의 국가들 수준이 됐다. 난민과 이민자 들이 스웨덴 사회에 화합되지 못하거나 ‘안 하여’ 온갖 범죄율과 사회문제들이 폭등하고 있다. 특히 이슬람계 이민자 갱단들에 의한 강력범죄 절반 이상은 미성년자들이 저지르는데 이는 그 갱들이 미성년자는 처벌하지 않는 스웨덴의 진보적인 법을 역이용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선입견에 의한 차별이나 포비아(phobia)가 절대 아니다. 가스통이 폭발해 집이 통째 날아가는 것과 같은 ‘물질적 사안’이다. 또한 이슬람계 이민자들만을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니며 스웨덴만의 문제도 아니다. 제일 와닿기 좋은 예가 스웨덴일 뿐 악화된 상황은 여러 나라에서 다양하다. 부디 대중은 정치인들이 감염시킨 겉이 번지르르한 ‘정치적 공상(空想)’이 아니라, 인간의 본색과 사람살이의 이치에 따라 이런 문제를 파악하고 이해해야 한다. 적절한 거리두기가 없는 선량함, 법치가 없는 진보국가와 진보사회는 불가능하다.
근대국가란 ‘개인의 탄생’이고 그 개인을 보호하는 공동체다. ‘개인’은 이기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의 인권이고 사랑이며 거기서 진정한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이다. ‘올바른 경계(righteous borderline)’는 당연하고 필수적이다. 그와 그의 집을 시달리게 한 건 물질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담벼락의 부재’였다. 스웨덴은 이 담벼락의 통과 기준이 ‘자발적으로’ 허술했고 부분적으로는 뻥 뚫려 있었다. 그랬던 걸 스웨덴은 지금 몹시 후회하고 있지만 ‘사회 화학적(化學的)’으로 오염되고 훼손된 국가를 치유하는 것은 이미 박살 난 유리컵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담벼락의 진정성’을 지키는 일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것에 대해 고뇌하고 문제 제기하는 것 자체를 ‘죄악시하는’ 언행이 패션이 돼버렸다. 자기가 당해봐야 안다는 게 인간의 진실이다. 하여 가장 더러운 짓은, 당할 일이 없는 자들이 마치 자기들도 같은 입장이라 전재하며 ‘허깨비 정의로움(ghost justice)’을 떠들어댈 때다. ‘담벼락’을 업신여기는 저 ‘깨어 있는(?)’ 정치인, 연예인은 경비원까지 있는 고급 담벼락 안에 살고 있다. 당하는 건 그들에게 환호하는 서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