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말할 게 없다면 말하지 않는 것도 거장의 품격 아닐까요. 침묵도 거장의 특권 아닐까 말이에요. 최근 방영된 넷플릭스 시리즈 ‘맨 끝줄 소년’엔 첫 소설을 낸 뒤 20년째 신작을 내지 못하는 작가이자 명문대 국문과 교수 허문오(최민식)가 나와요. 그는 옛 친구이자 막대한 부를 쌓은 성공한 소설가 김수훈(허준호)을 향한 강렬한 열등감과 질투심에 잠식돼 왔어요. 청년 시절 허문오는 자신의 두 번째 소설의 초고를 김수훈에게 보여준 뒤 그에게 받은 피드백의 충격으로 여태껏 신작을 내질 못했죠. 김수훈의 피드백은 단말마 같았어요. “잘 모르겠더라. 작가가 무슨 얘길 하고 싶어 하는지. 할 얘기가 없으면 그냥 안 해도 되지 않나?”
[3] 홍상수 감독의 서른네 번째 장편 ‘그녀가 돌아온 날’(5월 개봉)을 보고 홍상수에겐 이제 더 할 말이 있는 걸까 없는 걸까, 알쏭달쏭했어요. 세상에 변하지 않는 진짜는 오직 ‘반복과 차이’뿐이라는 그의 예술적 테마가 여기서도 반복되거든요. 결혼 후 딸을 낳고 이혼한 뒤 10여 년 만에 독립영화로 컴백하는 여배우(송선미)가 주인공. 시사회가 끝난 뒤 여배우가 30분 간격으로 여기자 셋과 차례로 인터뷰하는 내용이죠. 세 기자는 비슷하거나 비슷하지 않은 질문을 여배우에게 던지고, 여배우는 비슷하거나 비슷하지 않은 답변을 해요. 장소는 레스토랑. 왼쪽엔 기자, 오른쪽엔 배우가 앉아 서로 쳐다보는 대칭 구도 화면은 시종 변하지 않아요.
여기자 1. ①외모=긴 머리를 반으로 접어 묶은 머리. ②전문성=영화에 대한 전문성 없음. ③성향=영화 본 소감을 여배우가 묻자 “마지막 장면은 내 안에서 힘이 솟아나는 느낌”이라며 최근 인간관계로 힘들어하는 기자 자신의 내면을 고백. ④관심사=영화적 관심은 없고 여배우의 이혼 사유에만 관심. 여배우는 “이혼하면 안 힘든 사람 있어요?”라며 뾰로통해져 답변 회피. ⑤취향=여배우가 생맥주 권하자 고사.그다음 여기자 2. ①외모=늘어뜨린 긴 머리. ②전문성=영화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없음. 자신의 사적 얘기만 늘어놓음. ③성향=영화 본 소감을 여배우가 묻자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무식을 솔직하게 드러냄. ④관심사=기자가 “지금 혼자 사시죠?”라고 묻자 여배우는 “2년 전 이혼했다. 내가 이 사람을 정말 사랑하는지, 이 사람은 그냥 애 아빠라 붙어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젠 딸과 반려견만 사랑하며 살 것”이라며 사유를 털어놓음. 그러자 여기자도 3개월째 사귀는 남자 친구에 대해 넋두리하며 공감대 형성. ⑤취향=여배우가 생맥주 권하자 “좋다”면서 함께 마심.
마지막 여기자 3. ①외모=긴 머리 묶은 포니테일. ②전문성=영화에 대한 전문성 바탕으로 공격적이고 꼬리에 꼬리는 무는 질문력. ③성향=영화 본 소감을 여배우가 묻자 “저는 좋게 봤다”며 평가적 태도. ④관심사=여배우의 이혼이나 반려견 등 신변잡기엔 무관심. ⑤취향=여배우가 권하기 전 아예 처음부터 생맥주를 함께 마시며 대화.
어때요? 기자마다 헤어스타일이 비슷하거나 다르고, 일에 대한 전문성이 비슷하거나 다르고, 성격이나 취향이 비슷하거나 다르죠. 그런데 놀라운 건, 인터뷰가 끝나고 저녁이 되자 여배우가 연기 수업을 받는 마지막 장면이에요. 낮에 있었던 인터뷰 3건에 대한 기억을 되살린 여배우가 인터뷰를 연기로 ‘재연’하는 순간이죠. 이번엔 인터뷰 1, 2, 3 사이의 반복과 차이가 아니라, 인터뷰라는 ‘현실’과 인터뷰에 대한 ‘기억’ 사이의 반복과 차이가 전개돼요. 돌아버리겠다고요? 대관절 이게 어떻게 영화냐고요? 실제로 홍상수 감독이 좋아하는 세잔의 그림처럼 점점 더 구조적이다 못해 추상적인 기호의 세계로 진입하는 이번 신작을 보노라면, 앞으로 홍상수는 이야기의 운동성이나 화면의 시각성, 대사의 청각성 자체도 무의미해지는 ‘소멸’의 세계로 나아가는 건 아닐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났어요. 그래요. 궁금해지는 걸 보니, 홍상수에겐 아직 할 말이 남아있네요.이승재 영화평론가·동아이지에듀 상무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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