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프리즘] 우리 경제의 회색코뿔소 '재정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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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프리즘] 우리 경제의 회색코뿔소 '재정적자'

1980~1990년대 인문·사회계열 대학생들에게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공부하는 것은 일종의 필수 교양이었다. 알베르 소불의 <프랑스 혁명>, 에릭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 등이 교재처럼 읽혔다.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왕실의 재정 파탄이었다.

국왕 루이 16세의 사치와 방탕한 경영으로 재정은 바닥났고, 각종 전쟁을 치르느라 국가는 빚더미에 올라 있었다. 국채 발행을 남발하면서 이에 따른 이자를 갚는 데만 국가 예산의 절반 이상을 퍼부어야 할 지경이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귀족·성직자에게도 세금을 매기려 했지만 이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무산됐다. 분노한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하면서 혁명의 불길이 타올랐고,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며 그렇게 절대왕정 체제가 붕괴했다.

지금 프랑스 정부는 230여 년 전과 비슷한 재정 위기의 한복판에 있다. 올 1분기 기준 정부 부채가 3조3458억유로(약 5500조원)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114%에 달한다. 2000년 이 비율이 59%였는데, 25년 동안 두 배로 치솟은 것이다. 올해 정부 부채로 지급해야 할 이자만 620억유로다. 재정적자도 GDP 대비 5.8%로 유로존 평균(3.1%)을 크게 웃돈다. 이 때문에 작년 12월 신용평가사 무디스에 이어 지난 12일엔 피치가 프랑스의 국가신용등급을 한 단계 강등했다.

재정적자 원인은 명확하다. 과도한 복지 지출에 있다. 프랑스는 ‘연대’라는 가치를 기반으로 질병, 노령, 실업을 국가가 책임지는 사회보장제도를 시행해왔다. 이는 국민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하지만 경제 성장이 멈추자 프랑스가 자랑해온 ‘연대’는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 나랏빚으로 돌아왔다. 정부 지출의 30%가 복지에 쓰인다.

늘어난 정부 지출은 웬만해선 줄이지 못한다. 작년 1월부터 이달까지 4명의 총리가 나랏빚을 줄이기 위한 예산을 내놨다가 야당과 국민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물러났다. 최근엔 전국 곳곳에서 시민들이 ‘국가를 마비시키자’며 긴축재정 추진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긴축재정이 ‘연대’라는 프랑스의 핵심 가치를 흔드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자신들의 이익은 조금도 포기할 수 없다는 게 진짜 속내임을 모두가 안다. 한 번 늘린 예산은 다시 줄이기 어렵다는 ‘래칫 효과’를 프랑스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의 위기는 한국엔 반면교사로만 그칠 사항이 아니다. 우리나라 국가부채도 무섭게 불어나고 있다. 올해 1300조원, 내년엔 1400조원을 넘어선다. 2017년 660조원에서 8년 만에 두 배가 됐다.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도 올해 49.1%에서 내후년엔 50%를 넘어설 전망이다. 저출생·고령화에 따른 의무지출 확대와 경제 성장 둔화가 맞물리면 장기적인 재정 부담은 가중될 수밖에 없다. 기획재정부 전망대로라면 국가부채 비율이 2045년 97.4%, 2065년엔 156.3%까지 뛴다.

무조건 허리띠를 졸라매자는 얘기가 아니다. 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재정을 풀어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마중물 역할을 하는 건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론 국가부채를 관리하는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재정수지, 국가채무, 지출, 세입 등에 일정한 기준을 정해 법적으로 관리하는 ‘재정준칙’이 그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한국과 튀르키예만 없다.

재정적자는 우리 경제에 재앙을 몰고 올 ‘회색코뿔소’다. 경고가 가시적이고 결과가 예상 가능하지만, 쉽게 간과하고 회피하는 위험 요인이다. 미래의 우리는 현재 프랑스와 얼마나 다를 것인지 자문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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