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조지아주 서배너 시내에 들어서면 생참나무 가로수에 흰 수염처럼 매달린 스패니시 모스가 미국 남부의 전형적 풍경을 자아낸다. 항구 인근 역사 지구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낡은 목조주택들은 이곳이 남북전쟁 직전까지 미국 최대 흑인 노예 무역항이던 역사를 상기시킨다. 남부연합군의 핵심 거점이던 서배너는 애틀랜타를 불태운 북부군 윌리엄 셔먼 장군의 초토화 작전에 놀라 조기 항복해 전쟁의 화마를 피했다. 그 덕에 오늘날 미국 동부 2위의 해상 컨테이너 항구이자 남동부 대표 관광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관광과 물류 중심지에 머물던 서배너는 최근 몇 년 새 미국에서 제조업 일자리 증가와 성장세가 가장 두드러진 도시로 변모했다. 조지아서던대(GSU)에 따르면 2022년 이후 제조업 분야 성장률이 25%에 달하고 신규 일자리도 4600개 이상 생겨났다. 올해도 조지아뿐 아니라 전국 평균을 크게 웃도는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기대됐다. 서배너 브라이언 카운티에 들어서는 현대자동차의 전기차 공장 메타플랜트가 성장 엔진 몫을 맡고 있다. GSU 측은 “서배너는 미국의 어느 도시도 경험하지 못한 제조업 성장세를 보이고 있으며 현대차의 대규모 투자 프로젝트가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조지아에 투자한 한국 기업은 현대차 외에 기아, SK온, LG에너지솔루션, 현대모비스, 한화큐셀, 현대트랜시스, 엔켐 등 140여 곳에 달한다.
제조업 부활의 선봉을 맡은 한국 기업 근로자들이 하루아침에 중범죄자 취급을 받으리라고는 현지인들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 9월 4일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은 서배너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공장 현장에서 한국 근로자 317명을 체포했다. 쇠사슬과 수갑이 채워진 채 잡혀가는 모습은 충격적 장면이었다. 밀입국 마약범이나 살인자 등 중범죄자에게 적용할 법한 일이 체포와 구금 과정에서 벌어졌다. 현지 일자리 창출과 제조업 부활을 위해 방문한 우방국 근로자가 받아서는 안 될 처우였다. 뉴욕타임스가 지난달 말 인터뷰한 한국 근로자들은 텍사스, 테네시, 오하이오의 반도체· 배터리 공장 건설에도 참여한 베테랑 기술자였다. 구금된 한국 근로자의 60%는 합법적 단기상용(B-1) 비자 소지자였다.
사건이 불러온 파문이 커지자 양국 정부는 부랴부랴 수습에 나섰다. 지난 1일 한·미 당국은 B-1 비자와 전자여행허가(ESTA)로도 공장 설비 설치 및 점검 활동이 가능하다는 점을 공식 확인했다. ICE의 과잉 단속으로 해외 기업 투자 위축 우려가 제기된 데 따른 조치지만 여전히 전용 전문직 비자가 빠진 미봉책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올해는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143주년이다. 미국은 본래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과 신미양요(1871)에서 보듯 무력을 앞세운 함포 외교로 조선을 개방하려고 했지만, 결국 외교로 방향을 바꿔 국교를 맺은 최초의 서양 국가가 됐다. 흥미롭게도 당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갔다가 불태워진 셔먼호는 남북전쟁에서 서배너를 함락한 윌리엄 셔먼 장군의 이름을 땄다.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서, 무력의 한계를 체감한 미국이 외교를 선택했듯이 오늘날 한·미 관계 역시 상호 존중과 협력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서배너 사태는 양국의 경제·외교 동반자 관계가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다. 지난 세기 한·미 관계는 일방적 양보나 힘의 논리가 아니라 상호 존중과 헌신 위에서 발전해왔다. 이번 사건이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한·미 양국이 동반자의 가치를 재확인하지 못한다면, 오랜 우방이 프레너미(frenemy)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점이다.

1 month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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