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활짝 열어놓았더니 바람이 차다. 이 서늘함이 좋다. 살갗 움츠러들게 하는 서늘함이 좋아진 건 9월 중순까지만 해도 더위를 앓았기 때문일 것이다. 여름의 몸을 제대로 살아본 덕분에 가을이 좋아진 나는 괜히 긴팔을 꺼내 입어 본다. 이 좋은 가을을 아껴 두고 싶다. 꿀벌과도 같이 햇볕을 쬐면서 동시에 서늘함을 만지작거릴 수 있는 이 순간을 좀 더 오래 붙들고 싶다. 나만 붙들고 있기는 아까운 순간이라 자꾸 옆 사람에게 말을 걸고 싶다. 아파트 단수 때 쓸 물을 양동이에 받아 두는 것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이 양동이가 되어 이토록 그리울 햇살과 바람을 받아 두면 좋으리. 이런 날이 며칠이나 될까. 보내기 아까운 날씨다.
중학교 2학년 아이도 보내기 아까운 날들을 쟁이는 중이다. 곧 중간고사라 매일같이 수행평가다. 투덜투덜하면서도 아이는 수행평가 준비에 진심이다. 한동안 장강명 작가의 <먼저 온 미래>를 읽더니, 어제는 밤새 인공지능(AI)을 주제로 발표 자료를 만들었다. 애 많이 썼는데, 발표는 잘했으려나 궁금해하는데 벌컥 현관문이 열렸다.
“엄마, 저 국어 수행평가 만점 받았어요!”
“와! 대단하다. 어떻게 했길래?”
“어떻게 하긴요. 아주 잘했죠.”
“아주 잘 어떻게? 너무 궁금하다. 엄마한테도 보여주면 좋겠네.”
“네? 또 발표를 하라고요?”
안 할 것 같던 아이는 의외로 순순히 발표를 시작했다. 크고 또렷한 목소리, 자신이 읽었던 책의 구절로부터 시작된 순수한 물음과 그 물음에 성실히 답하려는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자기 가슴 언저리에서 움직이는 손동작까지도 마음에 쏙 드는 발표였다.
“동영상 링크는 제대로 작동했어?”
“아뇨. 안 열려서 동영상 내용을 말로 설명해 줬어요.”
“어떻게?”
아이는 못 말린다는 투로 고개를 가로젓다가도 결국 보여줬다. 이런 시간도 가을 날씨처럼 훅 지나가겠지. 나도 그런 세계를 살아봤다. 지나고 나면 별거 아닌데, 성적 따위 수행평가 따위 아무것도 아닌데,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되는데, 그땐 참 그게 중요했던 세계를 살아봤다. 그렇게 작은 세계를 전부라고 생각하던 때가 인제 와서는 몹시도 그립다. 밤이 깊도록 안경을 벗지 않고 공부하는 아들 덕분에 나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세계의 손잡이를 잡아본 것만 같았다.
아이는 시험 범위에 해당하는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 때문에 아빠랑 한참 옥신각신하더니 묻는다.
“엄마, 아빠가 감자 개수가 시험 문제로 나올 수도 있다고 외우라는데, 그게 진짜 나올 것 같아요?”
“세 개 아닌가?”
“엄마 그게 아니라, 점순이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주인공 나에게 준 감자의 개수를 구하시오. 1번 한 개, 2번 두 개, 3번 세 개. 이렇게 문제를 낸다고요? 이게 말이 돼요?”
아이는 시험공부를 도와준다면서 이상한 데서 고집을 부리는 아빠 때문에 진도가 안 나간다며 한참 하소연했다. 아까운 시간이 줄줄 새는 걸 지켜보기가 힘들어 아들 편을 들었다.
“그만하고 넘어가 좀! 단원의 주제가 ‘시점’인데 감자 개수가 뭐가 중요해?”
“그게 얼마나 중요한데! 너 같으면 감자를 하나 주면 받아 주겠냐? 세 개 정도는 줘야지.”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더 이상 따지기를 포기했다.
“그래, 꼭 시험 문제에 나오길 바란다.”
“사소한 것까지 공부한 학생만이 맞출 수 있는 문제는 하나쯤 나오기 마련이야.”
중학생 아들 중간고사 시험공부 하는데 부부가 더 난리다. 방해나 안 되면 다행이다. 어쩌다 하찮은 감자 개수까지도 참 중요한 세계가 되어버려서, 부모도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1 month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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