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말저런글] 길을 잘못 든 여인은 춘희였다

1 month ago 6
고형규 기자

길을 잘못 든 여인이 춘희가 된 내력을 추적해 봅니다. 고전음악을 잘 모르지만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는 들어 봤습니다. 이탈리아가 마르고 닳도록 자랑해 마지않는 그 인물에 그 오페라 말입니다. traviata는 여성 정관사 la와 함께 쓰여 길을 잘못 든 여자, 바른길을 가지 못하는 여성을 뜻합니다. 길 잃은 여인이라고만 하면 부족한 느낌이 들고 타락한 여자라고까지 하면 편견이 두드러진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방황하는 여인 등 여러 제목 달기가 가능한 이 가극 이름의 원본은 따로 있습니다. 프랑스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fils. 아들)가 쓴 『동백 여인(La dame aux camelias)』입니다. 이게 일본으로 넘어와 椿姬(つばきひめ. 츠바키히메. 동백 여인)가 되었고 그 일본산 한자어가 우리말로 읽혀 춘희로 굳었습니다. 라 트라비아타가 춘희가 되어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경위입니다. 한국에서 춘(椿)은 동백이 아니라 참죽 나무를 일컫는다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려나요. 뒤마 피스가 『몬테크리스토 백작』으로 유명한 알렉상드르 뒤마의 아들임을 안 것은 덤이고요.

원본, 원문, 원어. 이렇게 근원 원(原)을 쓰는 것들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일례로 받아들입니다. 갖가지 오류와 통설, 역사의 한 장면이 버젓이 진실인 양 사이버 공간에서 유통됩니다. 잘못된 줄을 모르고 옮기고 또 옮기고 퍼 나르고 또 퍼 나르며 베끼고 또 베끼는 탓입니다. 파고 또 팠지만 못 미쳐 잘못을 저질렀다면 정상참작이 될 겁니다. 하지만 제대로 알려고도 않고 알고도 애써 눈 감은 채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것은 문제가 좀 다르겠습니다. 근원에 닿으려면 자료 조사와 문헌 탐구에 품을 많이 들여야 합니다. 한두 번의 인터넷 검색과, 내세울 게 디자인뿐인 책 몇 쪽 읽기로는 모자를 수밖에 없습니다.

글쓰기 교육 전문가인 작가 이강룡은 『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에서 "원문을 바로 옮기지 않고 다른 언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옮기는 걸 중역(重譯)이라고 하는데, '춘희'란 제목은 중역의 문제점을 전형적으로 보여 준다"고 말합니다. 춘희를 듣고 '동백 여인'을 떠올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판단에서입니다. 하물며 춘희가 길을 잘못 든 여인이었다고요? 그것을 알아채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불가능할 따름입니다. (서울=연합뉴스, 고형규 기자, uni@yna.co.kr)

※ 이 글은 다음의 자료를 참고하여 작성했습니다.

1. 이강룡, 『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 도서출판 유유, 2017

2. 네이버 블로그, 필유린의 클래식 n 빛과색, 오페라음악 /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 - https://m.blog.naver.com/opazizi/100017991173

3. 카멜리아의 여인 - https://en.wikipedia.org/wiki/The_Lady_of_the_Camellias

4. 국립오페라단, 공연 / 라 트라비아타 - https://www.nationalopera.org/cpage/show/showInfo/9111

5. 라 트라비아타 - https://ko.wikipedia.org/wiki/라_트라비아타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02/05 05:55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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