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재의 패러다임 디자인]〈17〉반도체 생태계의 서사를 바꾸자 (이재용, 최태원 회장의 결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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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AI) 슈퍼사이클이 시작됐다. 모델은 거대해지고, 데이터는 폭증하고 있다. 그래픽처리장치(GPU), 고대역폭메모리(HBM), 첨단 패키징, 전력과 냉각까지 모두 하나의 시스템이다.

이 거대한 파도 앞에서 한국이 다시 세계를 이끌려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두 거인만으로는 부족하다. 산업 전체가 연결된 '반도체 생태계 전략'이 필요하다.

대만이 한국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세계 최대 파운드리 기업 TSMC가 있다. TSMC의 경쟁력은 공정 기술 자체보다 '협력의 방식'에 있다.

TSMC의 '오픈 이노베이션 플랫폼'(OIP)은 설계사, 소재·장비 업체, 대학, 연구소, 패키징 기업을 한 무대에 세웠다.

멀티프로젝트웨이퍼(MPW)로 수백 개 설계팀이 저비용으로 시제품을 반복 제작하고, 공정설계키트(PDK)와 지식재산(IP) 라이브러리를 개방해 학습 속도를 높였다. 정부는 전자설계자동화(EDA) 사용료와 테스트 비용을 보조했고, 대학은 캡스톤 과제를 통해 실전형 인재를 공급했다. 이렇게 수요와 투자의 선순환이 완성됐다.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분명하다.

첫째, 구형·중간 공정의 '개방형 라인(Open Line)'을 구축해야 한다. 중소 팹리스와 대학에 상시 개방하고, 소량 반복 생산을 전제로 합리적 단가를 책정하자.

둘째, 국가 지원 MPW 프로그램을 상설화하자.

셋째, 패키징과 테스트를 지역 거점과 연계하자. 광주·전남 지역에 RE100 전력을 활용한 친환경 패키징 클러스터를 세우고, 실리콘 이후를 대비한 하이브리드 본딩과 2.5D·3D 적층 기술을 연구하자.

넷째, 수익 공유형 펀딩 제도를 도입하자. 성공 칩의 로열티 일부를 펀드로 환류해 차세대 팀을 자동 지원하는 구조를 만들자. 파운드리 진입 장벽을 낮추고 HBM·컴퓨트익스프레스링크(CXL)·프로세서내메모리(PIM) 같은 메모리-로직 융합 기술의 개방형 레퍼런스를 제시해야 한다.

반도체 생태계는 글로벌 대기업 몇 곳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수많은 중소·중견 반도체 기업이 건강하게 생존해야 대한민국이 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중소기업이 장비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소량이라도 웨이퍼를 공급해야 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공정·패키징 호환 지침과 신뢰성 데이터셋을 공동 공개하고, 스타트업이 즉시 접속할 수 있는 표준 모듈을 제공해야 한다. 대학은 반도체+AI 융합 트랙으로 교육과정을 개편하고, 기업은 현장 인턴십을 학점과 연계해야 한다. 정부는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시제품의 신속 인증 경로를 마련해야 한다.

입지도 바꿔야 한다. 캠퍼스를 기업대학으로 전환해 연구·주거·실험이 한곳에 모인 초밀도 혁신지구를 조성하자. 균형 발전은 이제 기술 전략의 언어다.

핵심은 속도다. 분기 셔틀, 월간 데모데이, 반기 로드맵 리뷰를 국가 캘린더에 고정하자. 실패는 값싸게, 반복은 빠르게, 학습은 공유되게 하자. 그 축적이 곧 초격차다.

지금 문을 열면 한국은 TSMC를 넘어서는 '협력의 힘'으로 인류의 데이터 시대를 선도할 수 있다. 함께 가자. 생태계가 곧 경쟁력이다.

이를 실행으로 옮기기 위한 세 가지 장치를 제안한다.

① 공용 IP 풀(Pool) 구축

국내외 IP를 선구매해 스타트업이 초기 비용 없이 검증된 블록을 활용하도록 하고, 상용화 후 매출 연동으로 정산하자.

② 국가 계측·신뢰성 허브 구축

투과전자현미경(TEM), 집속이온빔(FIB), 자동광학검사(AIM), 음향방출분석(AE), 고온동작수명시험(HTOL) 등 고가 장비를 공동 활용해 중복 투자를 줄이고, 데이터를 익명화해 레퍼런스 데이터베이스로 축적하자.

③ 수요 연계형 조달 시스템 도입

공공·에너지·모빌리티 기업과 선구매 계약을 체결해 초기 칩의 테스트베드를 확보하자. 수요가 보이면 금융이 붙고, 금융이 붙으면 사람이 모인다. 지배구조도 혁신해야 한다. 'K-반도체 생태계 동맹'을 만들어 대기업·중소기업·대학·정부가 공동 참여하는 이사회형 거버넌스를 구축하자. 과제 선정은 블라인드 심사로, 성과 평가는 공개로, 실패 과제의 데이터 공유는 의무화하자.

포상은 개인이 아니라 팀과 생태계 기여도에 연동해야 한다. 규칙이 공정하면 참여는 자연스럽게 늘어난다. 반도체는 모두의 미래다.

마지막으로, 서사를 바꾸자.우리는 더 이상 하청 산업이 아니다. 설계가 출발하고, 제조가 뒷받침하며, 패키징이 완성하는 '한국형 삼각 편대'가 표준이 돼야 한다.

스타트업은 빠르게 실험하고, 중견기업은 과감히 스핀오프를 만들며, 대기업은 플랫폼을 개방해야 한다. 그때 한국의 반도체는 부품이 아니라 솔루션, 공장이 아니라 생태계가 된다.

초격차는 혼자 달려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서로의 어깨 위에서 더 멀리 보는 순간 완성된다. 이제 선택의 시간이 왔다. 문을 여는 용기, 규칙을 고치는 결단, 실패를 감수하는 합의가 모이면 답은 명확하다.

한국은 할 수 있다. 우리가 곧 생태계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팹의 명예회장'으로 나서 새로운 서사를 열어야 한다.

또한 반도체는 산업통상자원부나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영역을 넘어, 전 부처가 함께 세우는 국가 전략이 되어야 한다. 불 꺼지지 않는 TSMC, 불 꺼진 한국 반도체. 불 꺼지지 않는 실리콘밸리, 불 꺼진 판교. 우리 운명은 아무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주 52시간 유연 근무는 일을 더 하자는 게 아니다. 더 잘하는 길을 찾아 나서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세워야 한다.

이광재 PD(전 국회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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