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곡은 밤에 들어야 해요[허명현의 클래식이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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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

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
“이 곡은 밤에 들어야 해요, 꼭요.”

처음 이 말을 들으면, 무슨 의미인지 선뜻 와닿지 않을 수도 있다. 음악은 언제든 들을 수 있는 것 아닌가. 낮에도, 버스 안에서도, 일을 하면서도.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떤 곡은 정말 밤이 되어야 비로소 제대로 들린다. 특히 ‘녹턴(Nocturne)’이라는 이름을 가진 곡들이 그렇다.

‘녹턴’은 라틴어로 ‘밤(nox)’을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말 그대로 밤의 분위기를 담은 음악이다. 이 장르를 처음 만든 사람은 19세기 초 아일랜드 작곡가 존 필드였다. 그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선율로 고요한 밤의 정서를 음악에 담아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녹턴’ 하면 떠올리는 음악은 대개 존 필드의 곡이 아니다.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의 이름이 먼저 떠오른다. 쇼팽은 녹턴을 훨씬 더 섬세하고 감성적으로 발전시켰고, 그 덕분에 이 장르의 대표 작곡가로 자리 잡았다. 녹턴이라는 말만 들어도 쇼팽이 떠오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쇼팽의 녹턴은 단순히 밤의 풍경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그 속에 머무는 인간의 감정, 밤에 홀로 깨어 있는 이의 마음을 세밀하게 그려냈다. 적막한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외로움, 회한,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의 파편들을 녹턴에 담아냈다. 그런 이유로 음악을 듣고 있으면, 단지 ‘밤’이라는 시간대가 아닌, 그 시간 속에서 잠 못 이루는 한 사람의 고요한 독백을 듣는 듯한 기분이 든다. 놀랍게도 쇼팽은 오직 피아노 한 대만으로 이 모든 감정을 그려냈는데, 그래서 오늘날 그는 ‘피아노의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클래식을 처음 듣는 사람에게도 쇼팽의 녹턴은 부담이 작다. 선율은 한 번에 귀에 감길 정도로 친절하며, 리듬이 복잡하지도 않다.

가장 먼저 추천하고 싶은 곡은 ‘녹턴 Op.9 No.2’다. 작품에 붙은 ‘Op.9 No.2’라는 숫자가 마치 암호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막상 들어보면 단번에 익숙한 멜로디라는 걸 알게 된다. 이미 수많은 영화나 광고에 사용된 이 곡은, 쇼팽의 21개의 녹턴 중 가장 사랑받는 작품이다. 쇼팽이 이 곡을 작곡한 건 20대 초반.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 들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오히려 세련되게 들린다. 고전음악이라는 인식이 무색할 정도로 부드럽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턴이 여전히 낯설게 느껴진다면, 그럴 땐 밤을 기다려 보라고 말하고 싶다. 밤이야말로 이 음악의 진가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밤은 음악의 표정을 바꾼다. 낮에는 잘 들리지 않던 어떤 감정들이, 밤이 되면 또렷하게 떠오른다. 음악이 다르게 들리는 것이다. 작은 음 하나, 짧은 쉼표 하나에도 마음이 머문다. 마치 은은한 조명이 비추는 방 안에 누군가 조용히 들어와 나만을 위해 연주해주는 것처럼, 곡과 나 사이에 어떤 장벽도 없이, 음악이 곧 내 마음처럼 느껴진다. 낮에는 그냥 익숙한 멜로디로 흘려듣게 되는 곡들도 밤에는 전혀 다르게 들릴 수 있다. 조금 더 우리에게 익숙한 노래로, 아이유의 ‘밤편지’가 그렇다. 낮에 들으면 그저 서정적인 멜로디와 잔잔한 감성이 먼저 느껴지지만, 밤에 들으면 완전히 다르다. ‘이 밤 그날의 반딧불을 당신의 창 가까이 보낼게요’라는 가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리고, 노래가 아니라 누군가의 목소리처럼 마음에 직접 다가온다. 말 그대로 밤이 되어야 비로소 편지가 도착하는 것이다.

우리가 낮에 무심히 들었던 익숙한 선율이 밤이 되면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마음속으로 스며든다. 쇼팽의 녹턴도 마찬가지다. 낮에는 배경처럼 흘렀던 선율이 밤에는 하나하나 마음에 박힌다. 그러니까 녹턴은 밤이라는 시간에 비로소 제 목소리를 내는 음악이다.

유튜브나 음악 스트리밍 앱에서 녹턴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작품에 대한 해설이나 전문 지식은 없어도 된다. 그저 밤에, 조용한 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틀어보면 된다. 억지로 집중하거나, 의미를 분석하려 들지 않아도 괜찮다. 음악이 말을 걸어올 때까지, 그냥 기다려 보면 된다. 감상이란 애초에 그런 것이다. 느끼면 되고, 그냥 흘려보내도 된다. 오늘 밤, 당신에게도 녹턴을 한번 들어볼 마음이 생긴다면 참 좋겠다.

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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