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 진압 청나라 군대 따라 40여명 입국 후 화교로 정착
시장 상권 잠식·폐쇄주의로 사회 갈등 심화…학살 참극 겪어
박정희 정권 때 경제기반 상실, '짱꼴라' '짱깨' 멸시에 시달려
탄핵정국 들어 反화교 가짜뉴스 범람…"중국과 동일시 안돼"
(서울=연합뉴스) 김재현 선임기자 = 중국인 이민자를 뜻하는 화교(華僑)가 한반도로 넘어온 것은 1882년 임오군란을 피해 피신한 명성황후(민자영)가 정권 탈환을 위해 청나라에 출병을 요청하면서다. 청군 3천명을 따라 조선에 온 상인 40여명을 위해 민씨 정권은 인천에 중국의 치외법권 지대를 설정하고 중국인의 조선 이주와 상업활동을 보장하는 조청(朝淸) 무역장정을 맺었다.
삶의 터전을 얻은 화교들은 인천과 서울 등 대도시의 상권을 잠식하며 무서운 속도로 부를 불려 나갔다. 조선 땅의 화교 인구도 급증해 일제 강점기가 시작된 1910년 1만명을 넘었고 1930년에는 약 7만명에 달했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러했듯 화교들은 민족 고유의 정체성을 고수하며 이윤 추구에 몰두했다. 화교들의 이런 폐쇄적 태도는 조선 민중의 반감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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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자료사진]
화교가 조선인의 일자리를 빼앗고 돈만 번다는 인식이 갈수록 확산하는 와중에 1931년 만주 지린성 만보산(萬寶山) 지역에서 "조선인이 화교에 의해 피살됐다"는 조선일보 오보는 참극을 초래했다. 인천 등 전국 각지에서 폭동이 일어나 수많은 살상자가 발생했는데, 평양에선 폭도들이 칼과 낫, 몽둥이를 들고 화교의 일터를 부수고 여자와 영유아 등 100여명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학살극이 벌어졌다. 그날의 참상은 1923년 일본인들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에 흥분해 조선인들을 도륙한 관동대학살의 양상과 닮았다.
화교는 해방이 되고 나서도 배척의 대상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민족 자본 육성을 위해 화교를 표적 삼아 외국인 토지 소유와 소매업 활동을 금지했다. 졸지에 재산과 경제 기반을 잃은 많은 화교는 한국을 떠나 대만으로 돌아가거나 홍콩과 미국으로 향했다. 한때 10만명 수준이었던 화교 인구는 2만명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화교가 돈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조롱과 멸시였다. 한국인이 화교를 가리킬 때 쓰는 말부터 그랬다. 한족을 청나라 노예(淸國奴)로 비유한 데서 유래했다는 일본어 '쨩꼬로(ちゃんころ)'는 식민지 조선에 들어오면서 '짱꼴라'로, 중국 가게 주인을 뜻하는 '장궤(掌櫃)'는 박정희 정권 들면서 중국인과 중국요리를 통칭하는 '짱깨'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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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마블 캐릭터 '캡틴 아메리카' 복장을 한 윤석열 대통령 지지자 안 모씨가 시위하는 모습. 안 씨는 지난 14일 명동 중국대사관에 난입을 시도하다가 경찰에 건조물 침입 미수 혐의로 현행범 체포됐다. 2025.2.15
화교가 근래 '영원한 이방인' 취급에서 벗어나는가 싶더니 윤석열 대통령 탄핵 정국 여파로 때아닌 수난을 겪고 있다. "화교가 외국인 특례로 의대에 간다", "윤 대통령이 화교 카르텔을 부수려다 감옥에 간 것" 등 가짜뉴스가 범람하고 탄핵반대 시위에 나선 사람들이 다짜고짜 "너 화교지?"라고 물으며 시민을 위협하는 모습도 종종 목격되고 있다.
한국과 담을 쌓는 중국인들에게 영주권과 지방선거 투표권 등 각종 혜택을 부여하고 국내 외국인들이 일자리를 잠식하는 데서 비롯된 반발이라지만, 적어도 화교만큼은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 화교는 1세기가 넘는 이 땅의 차별 속에서도 한국 사회에 다가가 소중한 일원이 된 존재다. 중국이 하는 짓이 밉다고 화교를 한 묶음으로 여겨 배척하는 건 무식의 소치다. 가짜뉴스를 믿고 흥분한 사람들은 아픔의 과거사를 알고 그만 자중하기 바란다.
jahn@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년02월27일 06시30분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