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조 "사도세자의 아들" 선포 후 기득권세력 껴안아
한동훈, 저서에 '강남·검사' 출신 빠져…서민층 공략?
한동훈, 尹 지우기 전략 뚜렷…배신프레임 경계해야
(서울=연합뉴스) 김재현 선임기자 =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1776년 4월 왕위에 오른 정조는 즉위 일성으로 자신이 죽은 미치광이의 아들임을 선포하고 아버지의 존호를 할아버지 영조가 내린 사도(思悼)에서 장헌(莊獻)을 추가한 사도장헌세자로 바꿨다.
사도는 '잘못을 후회하고(思) 일찍 죽었다(悼)'는 의미로, 비행을 일삼다 살인마가 된 자식을 왕이라서 불가피하게 죽였음을 설명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인 것을 후회하며 슬퍼한다'는 뜻이라는 건 호사가들이 지어낸 얘기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영조는 죽기 직전까지 손자 정조에게 "네 아비를 절대 왕으로 추숭하지 말라"고 당부할 정도로 처결의 정당성을 양보할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그래서 사도장헌세자라는 시호에는 손자를 왕위에 올린 영조를 배신하지 말라는 노론 기득권 세력을 껴안고 정통성 강화를 통해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는 정조의 의도가 담겼다고 봐야 한다.
(서울=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13일 한동훈 사법연수원 부원장을 초대 법무부 장관 후보로 발탁했다.
사진은 지난 2020년 2월 13일 당시 윤석열 검찰총장이 한동훈 부산고검 차장검사와 다정하게 인사하는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저서 출간으로 정치 재개에 나섰다고 한다. '한동훈의 선택-국민이 먼저입니다'라는 저서에는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해제와 탄핵소추, 당 대표 사퇴까지의 상황이 생생하게 펼쳐진다고 출판사는 소개했다. 저자 소개란에는 과거 서민동네였던 서울 중랑구 중화동에서 태어나 충북 청주에서 자랐다고 적혀 있다.
한 전 대표는 서울 서초구 신동초와 경원중, 강남구 압구정동의 현대고를 나와 21년간 검사로 재직한 엘리트의 전형이다. 남다른 출신 배경에다 '조선제일검' 칭호까지 붙은 화려한 이력이 보수층에 소구해 '잠룡 한동훈'의 원동력이 됐다.
그런데 약력에는 초·중·고 교명과 검사 경력이 빠졌다. 많은 서민에게 비판과 질시의 대상인 '강남'과 합리적 중도로부터 외면당한 윤 대통령과 얽힌 지난날을 지우려는 의도로 보인다. 한동훈 캠프에선 그를 고대 로마의 브루투스에 비유하는 이가 적지 않다. "양아버지 카이사르보다 자유 로마를 더 사랑해서 독재자를 죽였다"는 브루투스처럼 은인인 윤 대통령보다 자유 대한민국을 더 사랑해서 탄핵에 찬성했다는 게 그들의 얘기다.
(서울=연합뉴스)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가 1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당대표 사퇴 기자회견을 마치고 이동하던 중 지지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2024.12.16 [국회사진기자단]
이런 맥락에서 한 전 대표는 '뉴 한동훈'의 전제 조건으로 정조 대신 브루투스 모델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주의를 위해 사사로운 감정 따위는 버렸다는 것인데, 표심과 직결되는 '정(情)'의 힘을 간과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람의 행동이 못마땅하면 매우 화내며 내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쩌다가…" 하며 동정하는 게 한국인 특유의 정서 아닌가.
과거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자신을 죽이려고까지 한 전두환을 용서하고 때마다 불러 융숭하게 대접한 것이나 가까이 윤 대통령에 대한 보수층의 분노가 동정과 지지로 변한 것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한 전 대표가 복귀 일성으로 "네! 나는 검사, 윤석열의 사람이었다"고 하고 '공정과 상식'의 초심을 실현하겠다고 말한다면 어떨까? 과거 인연은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고, 억지로 지우려 들면 '배신자' 소리만 듣는 게 정치권의 생리다. 한 전 대표에게 필요한 건 빤히 보이는 차별화 전략이 아닌 백성 눈높이에서 못난 아버지를 거명한 정조의 용기가 아닌지 생각해봤으면 한다.
jahn@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02/20 13:53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