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장택동]수사와 재판에서 잊혀진 ‘피해자’

4 weeks ago 9

장택동 논설위원

장택동 논설위원
지난달 19일 시행된 개정 형사소송법과 형사소송규칙에는 범죄 피해자가 소송기록의 열람·등사를 신청하면 재판장이 원칙적으로 허가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국가 안전보장 등 예외적 이유로 불허할 때는 피해자에게 문서로 이를 설명하도록 했다. 이전까지 법원장의 재량에 맡겼던 것에 비하면 피해자의 권리가 진일보한 것이다. “몇 번이나 재판기록 열람을 신청했지만 허가해 주지 않았다”는 이른바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 등의 호소가 반영된 결과다.

피해자가 본인과 관련된 사건의 기록을 보는 것조차 까다롭게 돼 있는 이유는 법적으로 형사절차의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재판의 당사자는 국가를 대신하는 검사와 피고인이다. 피해자는 수사 단계에선 주로 참고인, 재판 단계에선 증인으로서 증언할 뿐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없다. 피고인이나 다른 증인이 거짓말하는 게 뻔히 보이더라도 피해자는 따질 수 없고 증거를 신청하지도 못한다. “피해자는 형사절차에서 잊혀진 존재”(조미선 사법정책연구원 연구위원)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형사사법의 당사자는 국가와 피고인”

형사사법의 주체를 국가와 피의자·피고인으로 보는 것은 한국뿐 아니라 대다수 대륙법계 국가에 적용되는 원리다. 그런데 이런 시스템을 유지하면서도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재판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는 대륙법계 국가도 일부 있다. 한 예로 일본에 2008년 도입된 ‘피해자참가제도’는 살인, 유괴, 성폭행 등 강력범죄의 피해자나 유족에게 ‘참가자’라는 별도의 지위를 주고 증인과 피고인을 신문할 수 있는 권리 등을 부여한다. 피해자가 형사사법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피해자에게 일본의 참가자와 비슷한 권한을 주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2011년과 2014년 발의된 적이 있지만 입법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법조계에선 이에 대한 찬반 의견이 맞서고 있다. 반대하는 측에선 재판에서 피해자의 목소리가 커지면 피고인이 유죄라는 심증이 굳어지게 되고, 형사절차가 사적 보복의 장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피고인의 방어권은 마땅히 존중돼야 하지만 그렇다고 피해자는 할 말도 못 하고 냉가슴만 앓는 것 역시 사법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본다. 신중하되 전향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피해자 국선변호인 확대 논의 시급

우선은 피해자에 대한 국선변호인 선임을 확대하는 방안부터 논의를 서둘러야 한다. 피고인에 대해선 미성년자 또는 70세 이상이거나 3년 이상의 징역형에 해당되는 사건으로 기소된 경우 등 폭넓게 국선변호인 선임을 의무화하고 있다. 반면 피해자는 아동청소년성보호법, 아동학대처벌법, 장애인복지법, 인신매매방지법, 스토킹처벌법 등 6개 법률에 해당하는 범죄에 대해서만 국선변호인이 선임된다. 변호사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피해자는 자신이 법적으로 어떤 권리를 가졌는지부터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모든 피의자·피고인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다고 형사소송법에 명시된 것과 달리 피해자에 대해서는 이 6개 법률에서만 개별적으로 변호사 선임권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에 ‘피해자 변호사’의 대상 범죄를 살인, 강도를 비롯한 특정강력범죄로 확대하고 미성년자 피해자 등에 대해선 반드시 국선변호인을 선임하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이 국회에 여러 건 발의돼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형사소송법에 피해자 변호사의 권한과 지위를 포괄적으로 규정하는 방안을 마련할 것을 8월 정부에 권고했다. 정부와 국회의 관심이 절실하다. 범죄 피해자들에겐 검찰개혁, 사법개혁 같은 거창한 담론보다 피부에 직접 와 닿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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