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우경임]문을 닫아 걸고 우리끼리 싸운 나라는 망했다

1 day ago 2

우경임 논설위원

우경임 논설위원
세계 200여 개국과 무역하는 경제 대국이다. 유엔, G20 등 주요 국제기구에서 그 역할이 커지고 있다. 외국인이 K-팝을 한국어로 떼창한다. 이런 ‘글로벌 한국’에 살면서 나라 밖을 보지도, 미래를 보지도 않겠다는 건가. 6·3 대선 후보들의 TV 토론을 보며 암담했던 이유다.

아무리 급하게 치러지는 대선이라지만 대통령이 되면 어떻게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고 미래를 열겠다는 것인지 잘 그려지지 않는다. 12·3 계엄은 단죄해야 마땅하지만, 국민은 그로 빚어진 극심한 분열 역시 통합되기를 바란다. 미중 패권 경쟁 속에 지정학적 질서가 재편되고 있다. 더 이상 남북 관계를 독립변수로 다루기 어렵게 됐다. 통상 환경은 급변하고 올해 경제성장률이 0%대로 주저앉을 판이다. 하지만 대선 후보들의 해법은 들을 수 없었고 “내란 세력 척결” “괴물 독재 저지”처럼 상대를 적으로 보고 퇴치하겠다는 언어만 난무했다.

‘죽음의 정쟁’ 끝은 인재 고갈과 가난

1세대 사회학자이자 보수주의 이론가인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의 ‘중용의 길: 류성룡 리더십’ 봉정(奉呈)식에 최근 다녀왔다. 2007년 ‘위대한 만남: 서애 류성룡’으로 시작해 류성룡을 연구한 다섯 번째 책을 제자들이 묶어 출판했다고 한다. 89세 노학자는 “마지막 저서일 것 같다”며 담담하게 알려왔다. 그 자리에서 한국 정치의 지독한 과거 지향성에 대한 원형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왜 미래로 가지 못하나. 송 교수는 그 원인을 여전히 동질성에 기반한 농업사회에 사는 것처럼 사고하기 때문이라고 봤다. 다름은 틀린 것이고 고쳐야 할 것이다. 극단적인 폐쇄성이다. 그래서 임진왜란이 끝나고 광해군, 인조반정을 거쳐 그 후 300년 이상을 조선의 정치는 ‘더 낫고 못하고’의 집권 능력 경쟁이 아닌 ‘죽느냐 사느냐’의 대결만 있었다. 죽음의 정쟁, 그 끝은 인재의 고갈이고 가난의 지속이었다. 그리고 조선은 망했다.

송 교수는 “다름이 같음을 압도하는 현대 사회에서도 다름을 수용하지 못한다면 그건 병리”라고 했다. 민주주의 제도를 갖췄더라도 다원성을 부정하면 병리 현상이 나타난다. 12·3 계엄은 국정을 일방통행하다 가로막힌 대통령이 국회 다수당을 힘으로 제압하려다 일어난 일 아닌가.

예외적인 시기가 있다면 류성룡이 재상으로 있었던 선조 초기부터 1598년까지 30년이다. 임진왜란이라는 망국 위기 속에 동인과 서인이 번갈아 집권, 정책적 협의를 했던 드문 시기였다. 이는 류성룡 리더십 덕분에 가능했고 그 핵심이 중용(中庸)이라는 게 송 교수의 해석이다. 중용은 ‘한가운데’라는 고정된 개념이 아니다.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적인 발전을 뜻한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양쪽 끝을 가 보고 가장 나은 선택을 하는 것이 중용이다.그래도 노학자는 미래를 낙관했다

이날 봉정식에서 질문이 나왔다. 지금의 정치가 조선의 당파 싸움과 닮았다고 하면서도 미래를 낙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강연 시간이 부족해 듣지 못한 답을 따로 물었더니 송 교수는 “관(官)을 견제할 민(民)의 성장”이라고 답했다. 조선과 달리 산업화로 기업이, 민주화로 언론이 생겼다. 정치가 잘못하더라도 제어할 수 있는 영역이 성장했다는 설명이다. 12·3 계엄으로 탈선한 ‘한국호’를 제 궤도로 돌린 건 국민이었다.

송 교수는 꼿꼿이 서서 강의했지만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요즘은 노환을 앓는 아내를 직접 돌본다고 했다. 제자들이 청소라도 돕겠다고 했더니 소학의 한 구절인 ‘쇄소응대’(灑掃應對·물 뿌려 비로 쓸고 응하고 대답한다)를 들어 “학문의 기본은 청소”라며 뿌리쳤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류성룡에 천착해 연구를 멈추지 않고 있다. 그가 400여 년 전 류성룡을 소환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분명했다. 문을 닫아걸고 우리끼리 싸운 나라는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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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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