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재영]오리무중 관세 협상, ‘예언서’ 다시 보기

1 month ago 9

김재영 논설위원

김재영 논설위원
7월 말 큰 틀에서 타결됐던 한미 관세 협상이 이후 조율 과정에서 오리무중에 빠지면서 안도감은 이제 막막함으로 바뀌었다. 대출·보증 형태로 생각했던 대미 투자 3500억 달러에 대해 미국 측이 ‘현금 선불’이란 억지를 부리고 있어서다.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 등을 통해 한국은 상호 윈윈을 꿈꿨지만, 미국 측은 이를 ‘미국만 위대하게(Solely Great)’로 생각하는 듯하다.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해 예언서를 다시 펼쳐볼 때가 됐다. 지난해 11월 나온 ‘국제 무역체제 재구조화를 위한 사용설명서’라는 제목의 보고서로, 보통 ‘미런 보고서’ ‘미란 보고서’ 등으로 부른다. 연방준비제도(Fed·연준) 내에서 홀로 ‘빅 컷’을 외치며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을 지원 사격하는 스티븐 ‘마이런’ 연준 이사가 썼다. 보고서가 나왔을 땐 우리가 이름조차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을 정도로 무명이었던 저자의 제안대로 협상이 흘러가고 있다.

‘현금 선불’로 현실화된 ‘100년 국채’

보고서는 “경제 불균형의 근원은 지속적인 달러 과대평가에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 제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재정·무역 적자를 줄이려면 달러 약세를 유도해야 한다. 통화 조정을 유도하는 지렛대는 고율의 관세다. ‘징벌적 관세’를 매긴 이후 관세 완화를 조건으로 다른 나라들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낸다. 미국의 안보 우산을 제거할 수 있다는 위협도 병행한다.

문제는 달러 약세로 기축통화의 지위가 흔들리고 국채 금리가 급등할 수 있다는 점이다. 보고서는 각국이 보유한 미 국채를 100년 만기 초장기 국채로 전환하도록 하면 이자 부담 없이 돈을 마음껏 쓸 수 있다고 제안했다. 유동성 부족을 우려하는 국가엔 통화 스와프를 당근으로 줄 수 있다. 운동도 하지 않고 마음껏 먹으면서 살은 빼겠다는 마법의 다이어트약 같은 처방이다.

4월 초 미국이 전 세계에 상호 관세를 선언한 이후의 진행 과정은 보고서의 주장과 비슷하다. 고율의 관세부터 던져 놓고 미국을 만족시킬 제안을 들고 오면 낮춰 줄 수 있다고 했다.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으로 급했던 일본이 먼저 손을 들었고, 한국도 일본의 합의를 기준점 삼아 협상을 서둘렀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3500억 달러 대미 투자는 알고 보니 말도 안 되는 족쇄였다. 전액 현금으로 받아 미국이 원하는 곳에 투자하고 수익의 90%를 미국이 갖겠다는 것은 남의 돈을 맘대로 쓰겠다는 100년 만기 국채 아이디어의 다른 버전이다.

일각에선 패전국에 부과된 전쟁 배상금보다 가혹하다며 협상을 엎어버리자는 주장까지 나온다. 상호 관세 25%를 적용받아도 한국 전체 수출은 4% 정도 줄어드는 데 그칠 것이며, 미국에 줄 돈으로 차라리 피해 기업에 지원하는 게 낫다는 것이다. 하지만 관세를 세수 확보를 넘어 협박의 수단으로 보는 미국이 더 높은 ‘징벌적 관세’를 매길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이 미국 시장을 아예 포기하는 도박을 하긴 어렵다.미국 요구 부당해도 판 엎을 순 없어

지금으로선 판을 깨지 않으면서 신중하게 협상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최소한의 방어장치인 통화 스와프를 포함해 투자 규모와 조건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일본의 움직임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차기 일본 총리를 예약한 다카이치 사나에 자민당 총재가 재협상 가능성을 시사했고,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재생상은 “5500억 달러 중 실제 투자금은 1∼2%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대출과 보증”이라고 주장하는 상황이다. 이번엔 7월 협상 때처럼 데드라인에 쫓겨 디테일을 놓치면 안 된다. 정치권도 정부와 협상팀에 대한 정치적 공세와 압박을 자제하고 차분히 기다려 주는 여유가 필요하다.

오늘과 내일 >

구독

이런 구독물도 추천합니다!

  • 주성하의 ‘北토크’

    주성하의 ‘北토크’

  • 이원주의 날飛

    이원주의 날飛

  • 이헌재의 인생홈런

    이헌재의 인생홈런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