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立春)이 지나 새봄이 들어섰다. 절기상 봄은 왔으나 도통 봄이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봄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더디 온다고 하지만 놀랍게도 입춘의 하늘, 땅, 공기 속에는 봄의 기운이 이미 들어서 있다.
봄에 들어온 양(陽)의 기운은 지구상 모든 잠자는 것을 깨운다. 입춘은 따뜻한 봄의 기운이 들어온(入) 시기가 아니라, 봄의 기운이 추위에 떨고 있던 것들을 녹이고 깨우는 시나브로, 즉 새로운 전환의 시기다. 이제 막 도착해 양기를 키우는 봄에게 열풍(熱風)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따뜻한 바람이 얼음을 녹이고 새순이 딱딱한 씨앗 껍질과 땅을 비집고 올라오게 힘을 불어넣으려면 이후(二候), 삼후(三候) 시간이 더 필요하다.
우리가 들판에서 풀꽃을 보고, 바람에 날리는 민들레 홀씨를 보고, 연녹색 잎이 무성한 나무를 본다면 아쉽게도 봄이 저물고 여름이 시작된 것이다. 봄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니다. 음기의 침묵을 깨고 위세를 약화하는 양기의 기운이 봄이요, 황소처럼 들이받고 옥죄고 깨부수는 것이 봄의 기운이다. 눈이 아니라 다른 감각을 동원해야 보이지 않는 봄을 볼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미 하늘과 땅, 공기에 깃든 봄을 우리 중 누가 제일 먼저 알아챌까.
오래전부터 공예가들은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 풍경과 자연 현상을 보며 작품의 주제로 삼았다. 특히 한국 공예는 예로부터 자연과 인간의 깊은 연결을 느끼며 자연주의적이고 자연 친화적인 것을 고유의 미의식이자 정체성으로 지향해왔다. 지금 활동하는 공예가들 역시 ‘자연’의 본성과 본질에 대한 깊은 사유와 깨달음을 작품의 주제로 삼는 이가 유독 많다. 특히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미세하게 바뀌는 봄의 맥동을 많은 작가가 예찬한다. 자연을 걷거나 정원을 가꾸며 자연이 깨어나 생동감으로 가득한 계절을 만끽한다. 그 속에서 자신이 보고 감동한 것들, 감각을 사로잡은 것들, 벅차오르는 기쁨, 희망을 오롯이 기억해 두었다가 작업실로 돌아와 표현한다.
공예가 신동원의 집은 민들레, 토끼풀이 뒤덮었다. ‘집’ 연작은 작가가 작업실과 살림집을 합쳐 이사하면서 새로 시작한 작업이다. 인적이 드문 곳, 작은 마당이 딸린 집 주변에는 봄날 민들레와 토끼풀 등이 마구 돋았다. 꽃잔디 생장에 피해가 될까 모조리 없애려 시도했으나 얼마 후면 땅거죽을 비집고 여기저기 무성해졌다. 결국 그냥 자라게 뒀다. 들풀은 참 잘도 자란다. 잡풀은 뽑고 제거하려고 해도 악착같이 살아난다. 화초보다 강한 잡초의 생명력, 생의 의지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집 모양의 하얀 도자기 표면 위에 무성한 민들레 또는 토끼풀을 음각으로 새기고 검은 안료로 선을 채웠다. 조각칼로 그리고 메우고 긁어내길 여러 번 반복한 후, 최종 고온의 불로 구웠다.
풀을 뽑던 어느 날, 작가는 ‘화단의 꽃들처럼 나도 한 철은 살다가는 생명’이라고 말하는 잡초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한낱 풀 무더기지만 숲을 이루고 자기 생을 살다 갈 것이다. 고전 회화의 화제(畫題)로 선비들의 칭송을 받던 매난국죽(梅蘭菊竹)도 아니고 그저 무성한 풀이지만, 그것은 흙 위에 그린 신(新) 산수화가 됐다. 흙을 빚고 무성한 들풀을 그 위에 그리고 지우길 거듭하면서 작가는 10여 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새 작업에 대한 의지도 다지고, 들풀처럼 사는 자기 삶에 희망도 불어넣지 않았을까. ‘무성하여라. 매해 어김없이 꽃 피우고 횃불 번지듯 자라는 너만큼 나도 나의 생에 꽃을 피우리라’라고 기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