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세계 최고 품질의 전력이 능사 아니다

1 day ago 1

[시론] 세계 최고 품질의 전력이 능사 아니다

어린 시절 저녁밥을 먹다가도, 시험공부를 하다가도 전기가 나가버리는 불시 정전은 다반사였다. 길쭉한 양초와 팔각형 UN 성냥은 모든 가정의 상비 용품일 정도로 정전은 말 그대로 일상이었다. 하지만 최근 마지막으로 경험한 정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실제 우리나라 연간 정전시간은 9.05분으로 영국(38.4분), 미국(43.8분), 프랑스(48.7분)보다 훨씬 짧다. 전력 품질이 세계 최고라는 말이다.

거저 얻은 결과물이 아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25기의 원전, 58개의 석탄발전기, 약 130개의 액화천연가스(LNG) 발전기와 전국을 거미줄처럼 이어놓은 총연장 52만㎞의 송배전망 등을 계속 증설해 왔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전력설비 증설에 따른 품질 유지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해 보이지 않는다. 지역 주민 수용성, 환경 의식 제고 등으로 과거와 달리 전력설비 증설이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여러 지역을 통과해야 하는 송전망 건설은 첩첩산중이다. 동해안과 수도권을 연결하는 송전선의 준공 시점은 당초 2019년에서 지역 주민 반대, 인허가 문제 등으로 거의 7년 늦은 2026년 9월로 연기됐다.

우리나라 전력 품질이 최악으로 떨어진 상징적 사건은 2011년 9월 11일 전력이 부족해 발생한 순환 정전이다. 당시 신규 발전소 건설이 시급했다. 공기업인 한국전력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 동해안 지역에 최초 민간 석탄발전소를 허가한 배경이다. 발전소는 민간 자본으로 짓고, 송전선은 한전이 맡는 구조였다. 세월이 흘러 민간 발전소는 속속 완공됐지만 한전이 맡은 송전선 완공은 깜깜무소식이다. 그사이 신한울 1, 2호기 원전도 완공돼 동해안 지역 발전 총용량은 17.9GW에 이르렀지만 기존 송전 용량은 여전히 11GW에 그치고 있다. 그나마 송전 우선순위를 점한 원전 8.7GW를 제외하면 남는 송전 용량은 2GW 남짓이다. 민간 석탄발전 총용량 7.4GW에 턱없이 부족하다. 민간 발전사마다 이용률이 20%를 밑돌고 수천억원의 적자가 예상되는 원인이다. 급기야 최근 민간 발전사들이 한전을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하려는 단계에 이르렀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송전망 운영에 소위 ‘N-2’ 신뢰도 기준이 있다. 산불, 폭풍과 같은 비상사태에 대비해 2개 송전선을 대기시키는 기준이다. 쉽게 말해 송전망의 절반만 사용하는 기준이다. 실제로 현재 동해안~수도권 송전망의 설치 규모는 22GW인데, N-2 기준을 적용해 용량의 절반인 11GW만 사용해 심각한 송전 제약이 발생하고 있다. 동해안 송전 제약 해소책으로 한시적으로 신뢰도 기준 완화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차량이 붐비는 고속도로에서 갓길 운행을 탄력적으로 허용하는 것과 같다.

동해안 석탄발전소는 최고 효율과 환경설비를 완벽하게 갖춘 최신식 설비다. 따라서 신뢰도 기준 완화는 발전사 적자 해소뿐만 아니라 한전의 전력 구입비도 낮추고, 환경에도 도움이 되는 일석삼조를 기대할 수 있다. 물론 정전 확률은 다소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수용가가 반도체 공장처럼 정전 확률 제로의 최고 품질 전기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신뢰도 완화가 곧 정전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최근 발생한 대규모 산불과 같은 사태가 벌어지면 신뢰도 기준을 바로 상향 조정해 정전 확률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만큼 혹시 있을 정전의 불편을 감내할 수 있지 않을까. ‘N-2’ 신뢰도 기준을 신줏단지 모시듯 고집할 필요는 없다. 세계 최고가 능사가 아니다.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