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처칠의 '사이렌 슈트'(Siren Su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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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확대 설전 벌이는 젤렌스키와 트럼프

설전 벌이는 젤렌스키와 트럼프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최재석 선임기자 = 위대한 전시 지도자로 꼽히는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는 상·하의가 하나로 붙은 점프슈트, 일명 '사이렌 슈트'를 공식 석상에서 즐겨 입었다. 이 복장은 원래 명칭이 '보일러 슈트'(boiler suit)였다고 한다. 영국의 보일러공이 배관 작업 중 그을음과 흙먼지 등의 오염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이 옷을 입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유래했다는 것이다. 주로 노동자들이 작업복으로 많이 입었는데 처칠이 이 복장을 하고 다니면서 차츰 유명해졌다.

보수당 출신 정치인인 처칠은 노동자 표심도 얻기 위해 이 옷을 입은 장면을 언론에 자주 노출해 서민 이미지를 구축했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전시 내각을 이끌게 된 처칠은 보일러 슈트를 전시 유니폼으로 이용했다. 전시에 성명 발표 때도 이 차림을 하고 나와 "공습경보가 울리면 이 옷을 덧입는 데 편하고 실용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공습 사이렌 이미지와 연계되면서 대중에게 사이렌 슈트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종의 '공습 대피복'인 셈이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전례 없는 '외교 참사'로 끝난 미국과 우크라이나 간 정상회담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이 입었던 옷이 처칠의 사이렌 슈트를 소환했다. 처칠은 1942년 1월 카키색 사이렌 슈트 차림으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과 회담하기 위해 백악관을 방문했다. 당시 처칠이 이 복장을 한 데는 전시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강조하면서 미국의 적극적인 2차 세계대전 참전을 설득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영국 BBC에 따르면 미·우크라 정상회담이 파국을 끝난 뒤 젤렌스키 지지자들이 2차 대전 당시 사이렌 슈트 차림의 처칠 사진들을 온라인에 올리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사이렌 슈트를 입고 백악관에서 루스벨트를 만나는 사진도 있었다.

젤렌스키는 전쟁을 이끄는 그동안 여러 차례 처칠과 비견되기도 했다. 복장도 줄곧 전시 지도자 이미지를 주는 카키색 군복 스타일을 고수했다. 이번에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는 우크라이나의 상징인 삼지창이 왼쪽 가슴에 새겨진 검정 긴팔 셔츠에 검은색 바지를 입었는데 트럼프 대통령은 "오늘 완전히 차려입었네"라며 비아냥 투로 반응했다. 친트럼프 성향의 방송인도 젤렌스키 복장을 조롱하는 듯한 질문을 하기도 했다. 정장 차림을 하지 않은 것도 정상회담 파국의 작은 빌미로 이용된 듯하다. 이번 외교 참사를 두고 트럼프 측에서 기획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으니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사이렌 슈트 차림의 처칠은 당시 백악관에서 환대받았다고 한다. 트럼프는 처칠의 강력한 리더십과 위기 극복 능력을 존경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1월 취임하자마자 바이든 전 대통령이 2021년 백악관 집무실에서 치웠던 처칠 흉상을 다시 배치한 것도 존경심의 표현일 것이다. 만약 젤렌스키가 정장 차림으로 백악관을 방문했다면 트럼프가 환대했을까. 트럼프가 정상회담이 결렬된 후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을 중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보도까지 나온 걸 보니 그럴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bondong@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년03월04일 16시28분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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