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최재석 선임기자 = 글로벌 흥행을 이어가고 있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중증외상센터'에는 주연 못지않게 명품 연기를 선보이는 조연들이 많다. 드라마 초반 처세에 능한 항문외과 과장으로 나오는 한유림(윤경호 분)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중증외상센터에 적대적이었다가 교통사고로 중태에 빠진 딸이 중증외상팀의 신속한 치료 덕에 목숨을 건지자 외상센터의 든든한 아군으로 변한다. 주인공 의사 백강혁(주지훈 분)은 그에게 말한다. "중증외상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입니다. 바보처럼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 드라마는 세계의 전장을 누비던 천재 외과 의사가 한 대학병원의 유명무실한 중증외상팀에 '낙하산'으로 부임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현직 의사가 쓴 원작을 바탕으로 한국 외상 의료의 현실을 해학적으로 고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만큼 판타지적 요소들이 많다. 주인공은 첫 장면부터 폭탄이 터지는 분쟁 지역을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한다. 절벽에 고립된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헬기에서 뛰어내리고, 절벽 바위틈을 펄쩍 뛰어 건너기도 한다. 돈만 따지는 병원 경영진에 맞서 오직 환자를 위한 마음으로 분투하며, 어려운 일들을 척척 해결해낸다. 시청자들은 현실에선 기대하기 힘든 장면들이 스크린 속에서 쉴 새 없이 펼쳐지다 보니 더 열광했을 것이다.
의사 백강혁을 현실에선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나라에서 중증외상 환자들을 주로 치료하는 곳이 전국 17개 권역외상센터다. 외상 전문 인력이 24시간 상주하며 교통사고와 추락 등으로 크게 다친 환자를 신속하게 진단하고 응급수술과 치료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다. 이를 위해선 충분한 중증외상 전문의 확보가 필수적인데 많은 센터에서 전문의 수가 기준에 미치지 못해 남은 인력이 과중한 업무에 시달린다. 대한외상학회에 따르면 외상학 전문의는 2010년부터 2024년까지 371명이 배출됐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권역외상센터에서 일하는 것은 아니다. 근무 여건이 좋고 연봉이 높은 일반병원으로 이직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지방에 있는 외상센터일수록 인력난이 더 심하다.
(서울=연합뉴스) 홍해인 기자 = 5일 서울 고대구로병원 본관 헤리티지 홀 외벽에 병원 연혁과 함께 2014년 보건복지부로부터 국내 최초로 지정된 중증외상 전문의 수련센터 개소 내용이 새겨져 있다.
정부가 권역외상센터 운영과 외상 전문 인력 육성에 적잖은 예산을 투입하고 있으나 지원 규모나 방식이 현실을 따라가긴 여전히 역부족이다. 정부 지원으로 중증외상 전문의를 양성해왔던 고대구로병원 '중증외상 전문의 수련센터'가 예산 지원이 막혀 11년 만에 문을 닫게 된 사례도 이 경우다. 보건복지부가 책정한 관련 예산이 기획재정부에서 삭감됐다가 국회 상임위 심의과정에서 부활했으나 작년말 국회가 증액 심의를 하지 않아 끝내 무산됐다고 하니 답답할 따름이다.
충청권 권역외상센터에서 일하는 외상외과 의사가 '또다시 살리고 싶어서'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지난해 12월 펴냈다. 저자는 외상센터가 책이나 쓸 정도로 한가한 곳이 아니라고 밝히면서 자신을 거쳐 간 환자들을 오래 기억하고 싶고, 필수의료 종사자들에게 관심과 응원을 부탁하기 위해서 책을 썼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의료개혁을 둘러싼 갈등 사태를 겪은 후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면서 "더이상 환자를 살리기 위해 나를 희생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아졌다"고 고백했다.
'중증외상센터' 마지막 화에서 새내기 의사가 백강혁에게 "외상센터에 가면 제가 뭘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백강혁은 "사람을 살릴 수 있게 되지. 우리 선생님들 의사가 된 이유 그거 아니었나? 진짜 의사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왔어요"라고 답한다.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얘기다. 현실에선 '사람을 살리고 싶어 의사가 된 사람'을 점점 기대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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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02/07 05:50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