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
(서울=연합뉴스) 최재석 선임기자 = 보건복지부는 2022년 '아동학대 예방의 날(11월19일)'을 맞아 아동학대 언론보도 권고기준을 발표했다. '가족 동반자살'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아동 살해 후 극단 선택'이라고 쓸 것을 권고했다. 동반자살이라는 표현은 가족 구성원 모두가 죽음에 동의했음을 전제하는 것으로 가해자는 따로 없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간 일가족 사망사건의 경우 부모 중 한명이 자녀와 배우자를 살해하고 마지막에 자신도 세상을 등지는 '가족 살해 후 자살'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동반자살이 아니었다. 지금은 '극단 선택'이라는 표현도 자제하도록 권고한다. 그만큼 언론이 사건을 어떻게 명명하는가가 독자의 인식에 주는 영향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경기 수원시 한 아파트에서 일가족 4명이 숨진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9일 새벽 주민 신고로 출동한 경찰은 아파트 단지 내에 40대 남성이 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지문 감식을 통해 3시간여 만에 이 남성의 신원을 알아냈지만, 하루가 훨씬 지난 10일 오전 11시께야 남성의 집에서 40대 아내와 중학생 아들, 초등학생 딸의 시신을 확인했다. 경찰은 '이 집 가족은 주말마다 여행을 간다'는 인근 주민의 진술에 따라 집 출입문을 강제 개방하지 않고 하루를 허비했다고 한다. 경찰 초동수사의 문제점은 따로 짚을 대목이다.
사건 현장에서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자영업자로 알려진 40대 가장의 휴대전화에는 지인에게 빌려준 수억 원을 돌려받지 못한 것을 한탄하는 내용의 문자메시지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경찰은 휴대전화 내용과 숨진 가족의 목 부위에 졸린 흔적이 있는 점 등으로 미뤄 일단 가장이 생활고를 비관해 가족들을 살해한 후 스스로 생을 마감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 중이라고 한다. 이 사건은 언론에 '일가족 사망 사건'으로 처음 보도됐으나 앞으로 수사 결과에 따라 명확한 용어로 사건의 성격을 규정할 필요가 있다.
이런 안타까운 일은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낯설지 않다. 가깝게는 지난해 12월 24일 경기 양주시에서 일가족 4명이 주차된 차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는데 부검 결과 유독가스 중독이 사망 원인으로 밝혀졌다. 일가족 사망 사건은 수사 결과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동인권단체 세이브더칠드런에 따르면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아동이 2019년 최소 9명, 2020년 12명, 2021년 14명, 2022년 14명이다. 줄어들기는커녕 느는 추세다. 더군다나 이 통계는 언론보도나 경찰청에서 취합한 사례일 뿐이라고 한다.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실제 피해 아동수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녀 살해 후 자살은 동반자살이 아니라 명백한 살인이다. 이는 한 가정의 비극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나서서 반드시 막아야 하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아동학대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왜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나는 걸까. 복합적인 요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자녀를 부모의 소유물로 보는 잘못된 인식이 바뀌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박주영 부산지법동부지원장이 울산지법 부장판사 시절 내놓은 관련 판결문은 이 문제를 명쾌하게 짚은 명문으로 지금도 회자한다.
박 판사는 2020년 5월 29일 어린아이와 함께 세상을 등지려다 아이는 죽고 자신은 살아남은 엄마 2명에게 징역형을 선고하면서 "동반자살이라는 표현에 숨겨진 잘못된 인식과 온정주의적 시각을 걷어내야 하며, 이 범죄의 본질은 자신의 아이를 제 손으로 살해하는 것이고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아동학대 범죄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사건의 발생 원인을 부모의 무능력이나 나약함으로 치부할 수 없고, 이런 범행에 대한 온정주의의 기저에는 아이들을 굳건하게 지지해줄 사회적 안전망이 없다는 불신과 자각이 깔려 있다"면서 "아동보호를 위한 제도와 사회적 안전망을 정비하고, 무엇이 이들에게 극단적 선택을 하게 했는지 면밀히 조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국가나 사회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국가나 지역 사회가 자녀를 책임져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면 세상을 등질 생각을 한 부모가 자녀를 보며 '혼자 살아가는 것보다 같이 가는 게 낫다'라는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았을 수 있다. 전문가들은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지 못할 때 국가나 지역사회가 대신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있다면 끔찍한 선택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최아라 광주대 교수 언론인터뷰)고 한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 3만6천624달러인 나라, 인구 5천만명이 넘는 국가 가운데 여섯번째로 GNI가 높다는 대한민국인데도 국민에게 여태껏 이런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bondong@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년03월11일 17시03분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