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릿한 눈을 비비고
엄마를 부르며 울기밖에 할 줄 모른다
부를 이름조차 잊은기억의 건너편 저 어둠뿐인 세상 밖에서
불빛이 비치는 풍경은
따뜻하기도 해라
나는 또 어디로 발걸음을 옮겨야 하나길잡이별조차 없는 어둠 속에서
가만히 혼자 걷는 이 길이 멀기도 하다
―장시우(1964∼ )
칼럼을 시작한 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 정말이지 시가 무슨 소용인가 주저앉고 싶을 때가 몇 번 있었다. 아이가 죽었을 때, 청년이 죽었을 때, 어머니가 오열할 때, 아버지가 절규할 때 시와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허난설헌의 ‘곡자(哭子)’라든가 김소월의 시를 가지고 뭔가 쓰기도 했는데 왜 위로의 시가 더 이상 남지 않을 정도로 어린 사람들은 죽는가. 착한 사람들은 죽는가. 죄 없는 사람들은 죽는가. 다 자란 사람을 우리는 성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성인이라고 해서 모두 어른은 아니다. 나이를 먹었다고 어른이 아니고 어른이 되어야 어른이다. 그렇다면 어른이란 무엇인가. 사전에 보면 어른이란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나온다. 그것이 모호하다면 나는 이 시를 참조하여 어른을 정의하고 싶다.
어른이란 이 시에 나오는 저 어린애를 안아주는 사람이다. 저 어린애를 걱정해주는 사람이다. 엄마를 부르며 울기만 하는 저 아이가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아이든, 내 밖에 존재하는 진짜 어린아이든 어린아이를 안아주고 보호할 줄 아는 게 어른이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어른과 살 권리가 있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 좋아요 0개
- 슬퍼요 0개
- 화나요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