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촬영하고 있는 작품이 사극인데 상투를 틀면 뒷머리를 올려야 해서 요 핑계로 한 번 길러봤습니다. 썩 잘 어울린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반응이 나쁘지 않아요."
배우 유해진은 귀 뒤로 머리를 새침하게 넘기며 장발 머리에 쏠린 시선을 재치 있게 무마했다. 배우에게 '변신'이란 새로운 모습을 원하는 관객들의 기대와 자신의 역량을 증명하기 위한 도전 사이의 균형잡기일지 모르겠다. 그는 "지금까지 많은 작품에 출연했고, 다양한 인물을 연기했다"며 "매번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나. 늘 하던 연기를 했다. 다만 '유해진 왜 저래?'라는 소리 안 듣고 작품에 녹아드는 것, 그것이 가장 큰 숙제"라고 소신을 밝혔다.
'왕의 남자'(2005), '베테랑'(2015), '택시운전사'(2017), '파묘'(2024) 4개의 천만 관객 영화를 보유한 유해진은 누아르, 코미디, 드라마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선악을 넘나드는 얼굴을 드러내 왔다.
유해진의 신작 '야당'은 지난 16일 개봉해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며 관객몰이에 나선 상황이다. 이 영화는 마약 수사의 뒷거래 현장에 실존하지만, 베일에 싸여있던 존재인 '야당'을 소재로 한 첫 한국 영화다. 야당은 수사기관의 브로커 역할을 수행하며 이익을 취하는 마약범을 뜻하는 은어. 이 작품에서 유해진은 권력에 야심을 지닌 독종 검사 구관희를 맡았다.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듯, '야당' 또한 범죄자, 검사, 형사의 얽히고설킨 이야기가 중심이라 기시감이 들지 모른다. 유해진은 "소재 자체가 새롭진 않지만, 야당과 검경이 얽힌 관계가 재밌어서 시나리오를 재밌게 읽었다. 야당이라는 존재 자체도 알고 계신 분들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관전포인트를 소개했다.
'야당'엔 전형적이지 않은 연기가 눈에 띈다. 유해진 또한 '야망'을 숨기려 노력했다고. 연출을 맡은 황병국 감독은 유해진에 대해 "말투, 행동이 실제 인물처럼 느껴져 함께 호흡을 맞추는 배우의 연기까지 진짜처럼 보이게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엄청나게 계산이 들어간 연기는 아니었어요. 짬밥 있는 검사니 풋내기처럼 감정을 드러내진 않겠지, 묵직한 검사라는 직업을 생각하며 최대한 누르며 연기했습니다. 야망이 보인다는 사실을 도드라지게 할 수 있죠. 다른 영화였다면 저도 받아치고 그랬을 거예요. 여러 인물이 나오고 액션도 많아 화려하고 요란해 보이는 작품이라, 저마저 그러면 소리가 요란할 것 같았습니다."
'야당'은 검경의 대립뿐만 아니라 대선 정국까지 나와 현재 우리나라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구관희가 "대한민국 검사는 대통령을 만들 수도, 죽일 수도 있다"고 말하는 장면은 관객들 사이에서도 회자했다.
유해진은 "지금 보는 분들은 시국적으로 보실 수 있겠지만 촬영할 땐 그렇지 않았다"며 "저도 이번에 보면서 '오' 했다. 우연치 않게 현실과 맞는다고 느낀다면 작품 전체에도 좋은 효과를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야당'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신에 대해 유해진은 '시X거'라는 욕설 대사를 꼽았다. 그는 "억눌렀던 구관희의 스트레스와 파워를 제일 잘 보여줄 수 있는 후련함이 있었다"며 "고민을 많이 했던 신"이라고 설명했다.
"원래는 대사까지만 있었는데 '시X거'가 절로 나오더라고요. 그렇게까지 해야지 구관희가 표현될 것 같았어요. 감독에게 '제발 욕 자르지 말아달라'고 부탁까지 했죠. 기술 시사 때 확인까지 했어요.(하하)
'야당'에서 유해진은 탁자 밑을 기어가며 온몸을 던졌다. 그는 "원래는 손뼉 치는 신이었는데, 제가 바퀴벌레처럼 보이고 싶더라. 그래서 탁자 밑에서 기어가는 모습을 찍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애드립이 뭐가 있냐고 물어보면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유해진은 아직까지 단 한 편의 OTT 작품에도 출연한 적이 없는 배우 중 한 명이다. 이에 대해 그는 "아무도 날 안 찾아서 그런 거 아닌가"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영화에 인이 박인 것 같아요. 익숙해져 있는 거죠. 친구들에게 이야기 들어보면 OTT 현장도 영화 현장이랑 거의 비슷하다고 해요. 안 해본 시스템에 대한 걱정, 두려움이 있어요. 그래도 해볼 만한 그런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면 해야죠."
유해진도 침체기가 지속되고 있는 영화계를 체감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작품 수가 너무 많이 줄었다"며 "전체적인 흐름이라 어떻게 할 방도가 없다. 영화를 한 사람으로 안타까움이 있고 봄날이 또 왔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강조했다.
영화배우로 활발히 활동하던 유해진은 지난해 무대로 돌아가기도 했다. 충북 청주에서 열린 연극 '열 개의 인디언 인형'에 출연해 화제가 됐다. 청주는 유해진의 고향이면서 배우 생활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그 연극은 제게 인터미션 같았어요. 명절에 온 식구를 만나면 불편한 게 없는 것 처럼 스트레스도 없고 불편함도 없었죠. 서울에서도 제안이 많이 들어왔었는데 무대를 오래 떠나있어서 겁이 나 못하겠더라고요. 연극과 영화는 전혀 다른 연기거든요. 하지만 청주 무대에 오른 뒤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시작했으니 좋은 작품이 있으면 하고 싶습니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