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당초 그대와 작별할 땐 오래 떠나 있지 않으리라 했지.
집 떠나 만 리 길 나그네 되어 도중에 좋은 친구를 만났네.
말하지 않아도 서로 마음이 빠져들었지. 술잔을 주고받지 않았는데도.난초는 마르고 버들마저 시들 듯 결국 처음의 언약 저버리고 마는구나.
젊은이들에게 이르노니 서로 안다고 사귐이 두터운 건 아니라네.
의리 위해 목숨까지 바친다 해도 헤어져 떨어지면 무엇이 더 남으랴.(榮榮窓下蘭, 密密堂前柳. 初與君別時, 不謂行當久. 出門萬里客, 中道逢嘉友. 未言心相醉, 不在接杯酒. 蘭枯柳亦衰, 遂令此言負. 多謝諸少年, 相知不忠厚. 意氣傾人命, 離隔復何有.) ―‘옛 시를 본뜨다(의고·擬古)’ 제1수·도잠(陶潛·365∼427)무성한 난초와 빽빽한 버들, 시는 여유롭고 평화로웠던 삶을 이렇게 은유한다. 이별은 길어지고 낯선 땅의 고난 또한 더해간다. 다행이라면 ‘도중에 좋은 친구를 만나’ 의기투합하며 지낸 것. 무언의 교감을 나누었으니 진실된 사귐이라 믿었을 테다. 화자는 ‘의리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준비가 돼 있다. 하지만 난초와 버들이 시들듯 ‘처음의 언약’은 깨지고 만다. 그 언약의 상대가 새 친구인지 떠나온 가족인지는 모호하다. 다만, 의리가 실로 소중한 가치라는 자각은 명료해 보인다.
시는 9수 연작시의 제1수다. 시제가 ‘옛 시를 본뜨다’인데 시인은 무엇을 본뜨려 했을까. 전란에 휩싸였던 한말(漢末) 문인시의 허무주의적 정서 혹은 염량세태의 개탄일 듯하다. 이는 도연명 전원시의 느긋한 이미지와는 결이 판이하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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