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프로골프(LPGA)투어 숍라이트 클래식(총상금 175만달러) 최종 3라운드가 열린 8일(현지시간), 이일희는 오전 4시에 눈이 번쩍 떠졌다. 17년 만에 단독선두로 최종라운드에 나선다는 부담감 탓이었다. "공동선두는 해봤지만 단독 선두 최종라운드는 처음이었어요. 많이 긴장하고 있긴 하구나 싶어 웃음이 났고, 언제 다시 경험할지 모르니 이마저도 즐겨보자 생각했죠."
대회장에는 예상보다 많은 갤러리가 챔피언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긴장한 탓에 전반에 아쉬운 스코어를 냈지만 중반부터 최고의 플레이로 스코어를 회복했고, 1타차 값진 준우승을 거뒀다. 경기를 마친 그의 얼굴에는 우승을 놓쳤다는 아쉬움 대신 최고의 골프를 치고 있다는 행복함이 가득했다.
한국팬들에게 기적같은 플레이로 한편의 동화를 선사한 이일희를 12일 전화로 만났다. 미국 LA에서 실내 골프 스튜디오 오픈을 준비하며 골프레슨을 하고 있는 그는 "지난 2주간 대회를 치르느라 밀린 레슨도 하고, 새 사업 준비도 하며 일상으로 빠르게 돌아오고 있다"고 활짝 웃었다.
◆"불운이 나를 무너지게 두지 않았다"
이일희는 골프팬들에게 한동안 잊혀졌던 이름이다. 2010년 LPGA투어에 진출해 2013년 퓨어실크 바하마 오픈에서 첫 승을 거뒀다. 꾸준히 20~30위권을 유지하던 그는 어깨 부상으로 투어 활동에 타격을 입었고, 2018년 시드를 잃었다.
역대 우승자 자격으로 매해 1, 2개 대회에 출전하던 그에게 올해 6월은 특별한 시간이었다. 앞서 5일 열렸던 US여자오픈에 예선을 거쳐 출전권을 따냈다. 커트 통과는 하지 못했지만 메이저대회에 나섰다는 자체가 행복했다고 한다.
사흘짜리, 평지 코스에서 열리는 점때문에 출전을 결심한 이 대회를 앞두고 이일희는 유독 몸과 마음의 컨디션이 좋았다. "US오픈을 뛰었다는 행복함덕에 제가 한껏 신나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골프를 2주 연속 선수로서 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더없이 행복했죠."
그리고 1라운드, 이일희는 보기는 1개로 막고 버디 9개를 몰아치며 완벽한 플레이를 펼쳤다. 그는 "18번홀에 와서야 제가 7언더파를 치고 있다는사실을 알았다"며 "마지막홀에서 이글로 베스트 플레이를 해볼까하는 욕심에 공격적인 어프로치를 했다가 버디로 마무리한 것마저 행복했다"고 돌아봤다.
예상치못한 선두권은 선수들에게 부담감과 악재로 작용하기 일쑤다. 하지만 이일희는 "최고의 플레이를 펼친 그 기분을 마음껏 즐겼다"고 돌아봤다. "내일도 이렇게 잘 칠 확률은 높지 않으니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고 싶었어요. 어릴 땐 그 순간들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거든요. 친구와 가족들의 연락에 모두 답장을 하고, 제 스코어를 자랑했지요.(웃음)"
그리고 1타 차 단독 선두로 나선 최종라운드, 초반에는 실수와 악운이 이어졌다. 특히 3번홀(파5)에서는 잘친 공이 없어지는 불운도 겪었다. 하지만 이일희는 '그래, 이게 골프지'라고 털어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있다'는 것이에요. 경기를 하는 동안 불운이 저를 무너지게 두지 않았고,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후반에 페이스를 회복한 이일희는 제니퍼 컵초(미국)를 1타 차이로 바짝 추격했다. 마지막 18번홀, 4m 이글퍼트에는 우승을 위한 불씨와 '인생역전'을 할 수 있는 풀시드가 걸려있었다. 하지만 이일희는 "다른 모든 퍼트와 똑같이, 홀까지의 라인을 읽는 것만 생각했다"고 했다. 아쉽게 홀을 스치면서 버디로 마무리했지만 그는 "컵초의 경기를 보며 즐거운 플레이를 했다"며 승자에게 진심어린 축하와 미소를 보냈다. 세계랭킹 1426위였던 이일희는 이 대회로 218위까지 뛰어올랐다.
여전히 그 퍼트가 생각나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일희는 "저 역시 한명의 일반골퍼다. 늘 아쉬움이 남는다"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 그때 그것만 안했어도'라는 생각을 하루에도 여러번 합니다(웃음). 하지만 그 상황에서 그 라이를 본 이유가 있었고 최선을 다했기에 거기에 머물러있지는 않아요."
◆사업가로 새 도전 나서
골프를 이렇게나 사랑하는 그이기에 부상으로 필드를 떠나야 했을 때 "눈앞이 캄캄해졌"을 정도로 절망했다. 이일희는 휴학 중이던 학교(성균관대)로 돌아갔다. "그간 못해본 것도 하고 싶었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어요. 서른살이 넘는 나이에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게 막막했지만 제 인생의 방향성을 잡아준 중요한 시간이었죠." 스포츠과학 전공이었던 그는 철학 수업, 교육학 개론 등 다양한 수업을 들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고 하고싶은 일이 무엇인지" 30대 초반의 새내기는 매 순간 치열하게 고민했고, 그렇게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혀갔다.
대학 졸업 후 금융 포럼 관련 일도 했다. 하지만 100일 가량 일한 뒤 "난 여전히 골프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LPGA투어 클래스A 자격을 따 레슨프로로 일하며, 과거 우승자 자격으로 매해 1,2개 대회에 출전했다. 그리고 이번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더 많은 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자격을 따냈다.
레슨프로로서의 이일희는 "골프가 재미있는 스포츠라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이라고 한다. "'골프가 나를 망가뜨리려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때가 많으실거예요. 저 역시 선수로서 '골프에게 속는' 경험을 많이 했어요. 사실은 골프가 아닌 나 자신에게 속는 것이란 걸 아마추어 골퍼들에게도 알려드리고 해요. 쉽고 단순하게 접근하면서 유혹을 쳐내면 백돌이든 싱글이든 골프에 속지 않을 수 있어요."
이제 사업가로서 새로운 도전도 준비하고 있다. 오는 8월께 LA에 'SUPAR'라는 이름의 실내 스튜디오를 열 예정이다. "단순한 연습장이 아닌, 내 골프를 정확하게 알고 골프의 재미를 찾아가는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다.
이번 대회를 통해 얻은 추가 출전기회를 어떻게 활용할지도 고민 중이다. "우선 메이저대회 에비앙챔피언십에 나갈 수 있어 기뻐요. 제가 어릴때부터 좋아했고, 좋은 기억이 많은 코스거든요. 이번 대회를 통해 좋아하는 시합을 골라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정말 행복합니다. 매 순간 지금을 즐기며, 그 안에서 열심히 싸워볼게요."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