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론/강인수]AI 투자 혈맥 뚫되 ‘사금고화’ 막을 해법 가능하다

4 weeks ago 9

AI 반도체 전쟁에 맞는 투자틀 설계할 때
금산분리 찬반 아닌 완화 방법 논의해야
‘기업은 GP-금융 연기금은 LP’ 결합 모델
투명성 확보 속 새 먹거리 투자 활로 열 것

강인수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

강인수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
오픈AI가 한국 기업에 초대형 인공지능(AI) 프로젝트 참여를 제안하며 촉발된 금산분리 논쟁이 우리 경제의 가장 민감한 뇌관을 건드렸다. 월 90만 장의 고대역폭메모리(HBM) 공급을 약속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이 엄청난 수요를 맞추려면 현재의 두 배가 넘는 천문학적 설비 투자가 필요하다. 이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 이재명 대통령이 ‘금산분리 완화’ 카드를 꺼내 든 배경이다. 하지만 즉각 이해충돌이라는 반론이 터져 나왔다. SK가 운용하는 펀드 자금을 SK하이닉스 증설에 투입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이는 재벌의 ‘사금고화’를 막는다는 대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만약 금산분리 완화가 단순히 특정 대기업이 계열사 투자를 위해 자금을 쉽게 조달하는 방식으로만 귀결된다면, 이는 원칙의 훼손이자 또 다른 특혜 시비를 낳을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의 낡은 규제를 허무는 것을 넘어, AI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투자 프레임워크를 설계하는 일이다. 이에 논의의 초점은 ‘완화 찬반’이 아니라, ‘어떤 방향과 조건으로 길을 열어줄 것인가’에 맞춰져야 한다.

가장 먼저, 우리는 AI 반도체 전쟁이 개별 기업의 이익을 넘어선 국가적 생존 과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미국의 700조 원 규모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에서 보듯 AI 인프라 구축에는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규모의 자본이 필요하다. 국가적 차원의 ‘투자 혈맥’을 뚫지 않으면, 어렵게 잡은 반도체 패권의 주도권을 순식간에 빼앗길 수 있다. 이것이 금산분리 완화 논의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해충돌의 위험을 제거하고 국가적 투자를 활성화할 구체적인 방향은 무엇인가? 해법은 단순 기업형 벤처캐피털(CVC) 규제 완화를 넘어선 ‘국가 전략기술 투자펀드’ 모델에서 찾아야 한다.

핵심은 자금의 모집과 운용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가령, SK가 기업 펀드 운용사(GP)가 돼 AI 반도체 펀드를 조성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펀드의 자금이 SK그룹 계열사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국내외 금융기관(은행·보험사)과 연기금 등 재무적 투자자(LP)들로부터 모집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즉, 산업자본(SK)은 시장을 읽는 전문성과 운용 능력을 제공하고, 금융자본은 자금을 제공하는 형태의 결합이다.

금산분리 완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금융기관들이 산업자본 운용 펀드에 더 자유롭게 출자할 수 있도록 ‘빗장’을 풀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기업이 GP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예외를 두거나 국민성장펀드 등과 공동 GP 형태로 참여하도록 하는 방안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기업 GP를 금융업으로 간주해 금산분리 규제를 적용하는 현행 공정거래법도 개정해야 한다.

이 모델은 사금고화 우려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될 수 있다. 첫째, 이해관계의 다각화다. 펀드에는 SK뿐만 아니라 다수의 외부 투자자들이 참여하므로, GP인 SK는 특정 계열사의 이익만을 위해 자금을 집행할 수 없다. 모든 투자 결의 과정은 펀드 전체의 수익성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수탁자 의무’ 아래 놓이게 되며, 이는 자연스러운 견제장치로 작동한다. 둘째, 강력한 외부 감시 시스템 구축이다. 이러한 펀드는 정부와 민간 전문가로 구성된 독립적인 기구의 감독 아래 운영돼야 한다. 투자 대상이 과연 국가 전략산업 육성이라는 본래의 취지에 부합하는지, 특정 기업에 대한 부당한 특혜는 없는지를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 대주주와의 거래 내역, 자금 흐름 등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위법 행위 발생 시에는 엄중한 법적 책임을 물어 시장에서 영구히 퇴출시키는 ‘원 스트라이크 아웃’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물론 금산분리 완화와 무관하게 회사채 발행, 유상증자 등 전통적인 자금 조달 방안도 강구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AI 전쟁은 그 속도와 규모 면에서 과거의 방식을 뛰어넘는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금융 해법이 필요하다. 이제는 소모적인 이념 논쟁을 멈춰야 한다. 금산분리 완화는 재벌에 특혜를 주자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미래 먹거리를 위한 투자 활로를 열어주자는 것이다. 지금은 그 길에 놓인 이해충돌이라는 지뢰를 제거하고, 사금고화라는 위험을 차단할 정교한 제어장치를 설계해야 할 때다.

금산분리는 절대 선도, 절대 악도 아니다. 문제는 시대에 맞는 관리 메커니즘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이다. 그것이야말로 금융 혁신과 산업 혁신을 동시에 이루는 한국형 해법이다. 투자의 혈맥은 뚫되, 위험의 뇌관은 확실히 제거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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