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겨울은 그 어느 때보다 힘들었던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겨울 초입에 발생한 비상계엄 사태와 연이어 터진 제주항공 참사 탓에 두문불출하며 우울한 연말연시를 보내는 사람이 많았다. 전시업계에서는 미술관을 찾는 이도 줄어들 것으로 우려했지만 기우였다. 추운 겨울 날씨에도 많은 사람이 미술관으로 향했다. 일부 전시는 주말에 표를 구하기 힘들 정도로 관람 열기가 뜨거웠다. 혹자는 시대가 혼란할수록 고요한 명화 감상에서 위안을 얻으려는 사람이 많아지는 반작용의 사회현상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명화에서 위안을 느끼는 사람들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글로벌 도시의 경쟁력을 논할 때 ‘문화예술 향유 기회’가 주요 평가 항목으로 포함되기 시작했다. 컨설팅 회사 AT커니는 2008년부터 전 세계 150개 도시를 평가해 ‘글로벌 도시지수’를 발표하는데 기업 활동, 인적자원, 정보 교류, 정치적 참여도와 함께 문화적 체험을 5대 평가 분야로 삼고 있다.
지난해 평가에서 도쿄는 뉴욕·런던·파리에 이어 4위에 오른 반면 서울은 11위에 그쳤다. 다양한 요인이 있겠지만 서울은 문화적 체험 영역에서 도쿄에 한참 뒤처진 게 사실이다. 명화 관람 기회만 해도 그렇다. 서울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블록버스터급 전시가 도쿄에서는 국립신미술관, 모리미술관, 국립서양미술관 등에서 수시로 열린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 서울과 도쿄의 경제 규모, 소득 수준, 컬렉터들의 구매력, 전시장 규모와 숫자 등 여러 변수가 있겠지만, 미술 전문가들은 제도적 차이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 바로 해외 미술품 압류 면제 제도다. 전시를 위해 해외에서 국내로 반입된 미술품에 대해 대여 기간 중 소유권 또는 채권 등의 소송이 발생해도 압류, 압수를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제국주의 및 나치 시절 자행된 약탈 등으로 미술품(또는 문화재)을 둘러싼 소유권 분쟁이 빈발하자 유엔이 2004년 채택한 ‘국가와 그 재산의 사법관할 면제에 관한 국제연합협약’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일본엔 있고, 한국엔 없는 것
일본은 2011년 미술품 압류 면제 제도를 도입했다. 덕분에 일본 내 미술관들은 해외 주요 기관과 협력해 고가 미술품을 안전하게 전시하고 있다. 미국은 1965년 이 제도를 시행했다. 한국은 미술품 압류 면제 제도가 마련돼 있지 않아 해외 미술관과 컬렉터들이 작품 대여를 꺼리는 경우가 많다. 해외 대여기관 입장에서 압류 가능성이 존재하는 국가는 위험 부담이 크기 때문에 대여 요청을 거부하거나 높은 보험료를 요구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일부 해외 미술관은 미술품의 압류 면제를 보장하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명의의 각서를 요구하기도 한다. 결국 국내 미술 애호가의 명화 감상 기회가 줄어들고, 이는 국내 전시 문화의 경쟁력 저하로 이어진다.
미술품 압류 면제 제도는 단순히 한두 개 대형 전시를 유치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국내 관람객에게 수준 높은 전시를 제공하고, 세계 미술 시장에서 한국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제도적 인프라다. 이미 여러 국가에서 도입해 성공 사례를 만들어낸 만큼 한국도 이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