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기업인의 쓰임새를 무시한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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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기업인의 쓰임새를 무시한 대가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개명한 재일 한인 중 유일하게 자신의 성을 지킨 인물이다. 그의 일본 이름은 손 마사요시다. 성(性)을 고수한 것으로 정체성을 간직한 손 회장은 한국과의 친연성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곤 했다.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을 시작으로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대통령까지 무려 다섯 명의 한국 대통령을 예방했다. 그때마다 손 회장은 그의 모국이 ‘테크 강국’으로 발전하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문 대통령과 만난 2019년 7월 환담 주제는 ‘인공지능(AI) 산업의 미래’였다.

한·일 저울질하던 손정의

이달 초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와 함께 방한한 손 회장은 ‘용산’을 건너뛰고 이재용 삼성 회장만 만났다. 대통령 부재라는 초유의 상황 탓이긴 하지만, 설혹 용산을 예방했더라도 그의 얘기는 이전 다섯 번의 예방 때와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손 회장의 최근 10년간 행보는 ‘일본의 부활’로 확실히 기울고 있었다. 일본의 아웃라이어(평균치를 거부하는 뛰어난 비주류)이자 타고난 사업가인 손정의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한국과 일본을 저울질했다. 외신에 나온 손 회장에 관한 스토리에 따르면 그의 꿈은 ‘인간 진화의 다음 단계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음’은 두말할 필요 없이 AI다. 16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그는 1980년대 초반 실리콘밸리에서 첫 창업을 했다. 1990년대 실리콘밸리에서 태동한 세쿼이아캐피털 등 미국 벤처캐피털(VC)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다섯 명의 한국 대통령에게 그의 비전을 꾸준히 설명했던 목적도 한마디로 요약하면 ‘손정의에게 투자하라’다.

손 회장의 의중을 꿰뚫어 본 이는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였다. 2016년 일본 정부가 AI, 사물인터넷, 로봇 등 첨단 산업을 국가 성장 전략의 핵심으로 삼았을 때 막후에서 책사 역할을 한 인물이 손 회장이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 처음 입성한 2016년 12월 일본 재계의 내로라하는 거물들을 제치고 백악관에 초청되기도 했다. 아베 전 총리는 첨단 산업 분야에서 미국과 일본을 연결할 가교로 손정의를 활용했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로 ‘아부의 기술’을 구사할 수 있던 것도 손 회장이 쌓아놓은 미국 내 거미줄 인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손 회장이 2017년 조성한 1000억달러 규모 소프트뱅크비전펀드의 출자자 목록엔 오라클 설립자인 래리 엘리슨 회장이 들어 있다. 두 사람은 지난 1월 트럼프 대통령이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다음날 선보인 AI 인프라 프로젝트 ‘스타게이트’ 발표 현장에 올트먼 CEO와 나란히 섰다.

AI로 진격하는 '팩스의 나라'

지금 AI 패권 경쟁은 몇몇 테크 거물이 주도하는 ‘그들만의 리그’나 다름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38세 올트먼의 손을 빌려 세금 한 푼 없이 수백조원을 미국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일본 정부는 세계 최대 반도체 기초설계 기업인 Arm을 손에 쥔 손정의 회장을 활용해 ‘사무라이 반도체’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 ‘팩스의 나라’라는 비아냥을 받던 일본은 ‘정보기술(IT) 시대’를 건너뛰고 빠르게 ‘AI 시대’를 향해 진격하고 있다. 손정의와 올트먼이 짜놓은 판에 한국은 속절없이 끌려다니는 처지다. 국가의 리더들이 기업인의 쓰임새를 무시한 대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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