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는 변한다. 가차 없이 변한다. 필연적으로, 창의적으로 변한다.’ 미국 작가 에이모 토울스의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에 나오는 문구다. 이야기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직후 시작된다.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지고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선다. 많은 귀족이 처형당하지만, 주인공 알렉산드로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은 혁명이 일어나기 전 우연히 쓴 시 한 편이 혁명의 불씨가 됐다는 이유로 살아남는다. 대신 평생 호텔에 연금된다. 한 발짝만 벗어나면 총살.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는다. 소설은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 속 갇힌 공간 안에서도 지혜롭게 새 삶을 찾아 나가는 로스토프를 좇는다.
급격한 변화는 디폴트값
소설 속 이야기처럼 세상은 가차 없이, 필연적으로 변한다. 최근 5년간 한국 소비시장이 그랬다. 극적인 변화에 휩싸였다. 시작은 코로나19 팬데믹이었다. 중국에서 시작된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는 국내 e커머스 시장 초고속 성장의 촉매제가 됐다. 팬데믹 이전인 2019년 7조원대이던 쿠팡의 매출은 지난해 40조원을 돌파한 것으로 추정된다. 5년 새 6배 가까이 급증했다. 쿠팡은 수십조원을 투입해 전국에 촘촘한 물류망을 구축했다. 빠른 배송을 무기로 시장을 무서운 속도로 잠식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1위 유통업체가 됐다.
2021년 쿠팡이 뉴욕증시에 상장해 대규모 자금조달에 성공했을 때 많은 이들은 ‘오프라인 시대는 끝났다’고 단언했다. 유통 공룡들은 블랙홀로 빨려 들어갔다. e커머스 블랙홀이었다. 같은 해 이마트는 3조4000억원을 들여 G마켓을 사들였다. 롯데도 ‘롯데온’을 출범하고 대규모 투자를 했다. 하지만 이들의 ‘미투 전략’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오히려 대규모 투자 여파로 휘청거리고 있다.
전통적 강자들은 다른 분야에서 부활하고 있다. 전문 영역인 오프라인에서다. 엔데믹 이후 오프라인 매장은 재정의됐다. 이들은 오프라인 세상의 경험에 목마른 소비자들을 겨냥해 단순히 물건을 팔던 매장을 ‘경험형 매장’으로 바꾸고 콘텐츠를 입혔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더현대 서울’과 ‘하우스 오브 신세계’다.
유연한 전략 세워야
최근 새로운 변화의 조짐이 감지된다. 영원할 것 같던 e커머스의 성장세도 끝에 다다랐다. 한국의 e커머스 침투율은 지난해 세계 최고 수준인 50% 선에 육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저가를 무기로 내세운 알리익스프레스, 테무 등 C커머스의 진격도 본격화하고 있다. 또 다른 위협 요인도 있다. 불황이다. 최악의 내수 침체 속에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기 시작했다. 장기적으로는 더 큰 도전이 다가오고 있다. 청년층 인구 감소는 기업의 미래를 갉아먹는 치명적인 악재다.
역동의 시대다. 이 시대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유연한 전략이 필수다. 침략자로 간주됐던 중국 알리바바와 손잡은 이마트의 결정은 그런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마트는 이 결정으로 대규모 손실 부담을 어느 정도 털어냈다. 최근엔 불황에 인기가 높은 창고형 할인매장 트레이더스 등 본원 경쟁력에 집중해 턴어라운드에 성공했다. 이제 급격한 변화는 디폴트값이다. 분명한 것은 변화의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변화를 인정하고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개인과 기업은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소설 속 로스토프 백작이 그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