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진짜 문화강국, '리치 헤리티지'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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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칼럼] 진짜 문화강국, '리치 헤리티지'에 달렸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대통령 직속 대중문화교류위원회를 신설하고 박진영 JYP엔터테인먼트 대표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공동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정부가 K팝을 비롯한 대중문화를 직접 강화해 K컬처의 글로벌 영향력을 국가 소프트파워의 핵심으로 삼겠다는 구상이지만, 국제 평가가 던지는 메시지는 다르다. 지금의 정책 방향이 과연 문화강국으로 가는 길인지 의문이다.

영국의 권위 있는 브랜드 전문 평가기관 브랜드파이낸스가 발표한 2025년 글로벌 소프트파워 지수에서 한국은 193개국 중 12위로 전년보다 세 계단 올랐다. K팝과 드라마의 힘 덕분이다. 그러나 세부 지표를 보면 ‘예술·엔터테인먼트’는 7위로 중국(9위)을 앞섰지만 ‘리치 헤리티지(Rich Heritage)’는 28위로 중국(3위)보다 25계단이나 뒤처졌다.

리치 헤리티지는 단순한 문화재 보유량이 아니라 세계인이 그 나라의 역사와 예술을 얼마나 ‘살아 있는 문화’로 체감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한국은 대중문화 이미지는 강렬하지만 전통과 예술의 존재감은 희미하게 인식되고 있다는 뜻이다. 정부의 대중문화 중심 전략이 국제 평가와 엇박자를 내는 대목이다.

이 괴리는 시장에서도 드러난다. 지난해 세계 미술 시장 규모는 575억달러(약 77조6000억원)로 영화산업보다 크고 음악산업의 두 배이며, 한국 자동차 수출액과 비슷하다(Art Basel&UBS). 미국이 43%, 영국이 18%, 중국이 15%를 차지했지만 한국은 7억7000만달러로 1%에도 못 미쳤다. 한국 순수예술의 존재감은 글로벌 시장에서 여전히 미미하다.

중국과 일본은 전통·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을 함께 키우는 장기 전략을 일찍부터 추진해왔다. 중국은 2004년부터 ‘공자학원’을 세계 곳곳에 세워 언어와 문화를 확산시켰고, 2013년 이후 ‘일대일로’와 연계해 해외 전시, 작가 파견, 국제 공동전시를 밀도 있게 추진하며 글로벌 미술 시장 3위, 소프트파워 2위에 올랐다. 일본도 전통 풍속화 우키요에(浮世絵)를 애니메이션, J팝 같은 현대 대중문화와 결합한 ‘쿨 재팬’ 전략을 일관되게 펼쳤다. 특히 일본은 2018년 프랑스에서 열린 ‘자포니즘 2018’에서 1년 동안 100여 개 전시와 공연을 선보여 문화적 존재감을 세계에 각인시켰다. 한국 정책의 허점이 부각되는 지점이다.

세계 유수 미술관 전시도 차이를 보여준다.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의 한국관은 백자 몇 점이 전부지만 일본관은 회화·공예·불교미술이 체계적으로 전시된다. 이는 단순한 기획력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 정부가 수십 년간 꾸준히 추진해 온 아웃바운드 전략의 결과다. 글로벌 소프트파워 지수는 17만 명 이상의 세계인이 참여해 국가 이미지를 평가한다. K팝과 순수예술의 소비층은 다르며, 세계 주요 미술관에서 매일 수천 명이 경험하는 전시는 단기적 인기와 별개로 그 나라의 깊은 문화 이미지를 형성한다. 한국은 그간 관광객 중심의 인바운드 홍보에 치중했지만 중국, 일본은 주요 선진국에서 자국의 리치 헤리티지를 아웃바운드 형태로 확산해왔다.

이런 맥락에서 정부 예산은 이미 민간이 주도하는 K컬처보다 전통·순수예술의 해외 확산에 집중돼야 한다. 대중문화는 민간의 창의와 경쟁에 맡기고 정부는 촉진자 역할에 머무르되 정책·재정 역량은 순수·전통예술의 글로벌 진출에 투입해야 한다. 세계 주요 미술관에 상설 한국관을 설치하고, 해외 순회전과 장기 전시를 통해 한국 작가에게 지속적으로 세계 무대를 제공해야 한다. 한국 작가들이 K팝 스타처럼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고, 동시에 해외 학자·큐레이터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디지털 아카이브·체험형 플랫폼으로 접근성을 넓혀 전문가와 대중 모두의 접점을 확대해야 한다.

대중문화는 강력하지만 유행 주기가 짧다. 반면 전통과 현대가 함께 쌓인 문화, 대중예술과 순수예술이 결합된 이미지는 세대를 넘어 지속된다. 지금 정부가 할 일은 K팝으로 민간이 소리를 낼 때, 정부가 리치 헤리티지로 세계에 깊이 침투해야 한다. 성동격서(聲東擊西)의 발상이 필요하다. 이제 막 출범한 이재명 정부가 K팝 열기에 편승해 성동격동(聲東擊東)의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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