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길 잃은 R&D, 국가 미래 좀먹는다

1 month ago 13

[다산칼럼] 길 잃은 R&D, 국가 미래 좀먹는다

국가 연구개발(R&D)은 우리나라에 사실상 유일한 전략적 투자다. 장기적 시각에서 지정학과 경제·산업 형편을 고려해 최적의 길을 개척한다는 입장에서 전략이다. 성장률이 제로로 회귀하는 경제 형편에도 국민이 미래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 있다는 차원에서도 투자다. 정치인들의 선거용 생색내기 자금이나 관료들의 뒷주머니가 아니다. 과학자들의 생계 자금도 대기업들의 적당한 실속도 아니다.

R&D 좀비기업의 식량도 아니다. 국민들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종잣돈이다. 네이처지에 따르면 우리나라 R&D 지출(2022년 기준)은 112조6460억원으로 국내총생산(GDP)의 5.2%다. 1위 이스라엘과 GDP 비중은 비슷하지만 절대액이 크다. 3위인 미국에 비하면 GDP 비중이 1.6%포인트 높다. 나라 형편에 비해 큰돈을 R&D에 쏟아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정신과 타성 그리고 제도적 기반으로는 전략적 성과나 투자 수익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R&D 투자의 전략성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목표와 방법의 도전성과 혁신성을 높여야 한다. 학술적으로나 실용적 차원에서 학계 및 산업의 통상적인 예상보다 몇 차원 높은 수월성을 품어야 하며, 창발적인 새로운 방법과 발상을 시도해야 한다. 적당히 편안하고 안일한 결과를 성과로 삼는 것은 국민 기대에 대한 외면이며, 전문성의 양심에 대한 배신이다.

둘째, 부처 간 칸막이를 없애야 한다. 부처들에 n분의 1로 나눠주는 즉시 효율과 성과는 급격히 떨어진다.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와 같은 범부처 기구 등을 구성해 이를 극복하려는 시도는 옳지만 갈 길이 멀다. 위원회 안에서도 산업 간, 기업 간, 동문 간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칸막이가 있다. 참석한 구성원들은 적당히 눈치껏 나누는 데 이미 익숙해져 있다. 자기들 나름대로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것이다.

이렇게 겹겹이 처져 있는 칸막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가 전략 최적화 모델과 논리를 개발해 전문가들이 나름대로의 전문성에 입각해 공개적인 포럼에서 지속적으로 서로 반박하고 토론하는 플랫폼을 수립해야 한다. 다양한 인공지능(AI)의 엄청난 연산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이제는 불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셋째, 전략적 입장에 대한 극도로 신속한 모니터링이 필요하다. 선진국과 경쟁국의 과학기술 및 첨단산업 동향과 R&D 사업의 최근 동향을 파악하고 우리나라 전략에서의 함의를 해석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한두 명의 전문가가 연구용역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과거 싱가포르의 국가위험관리시스템(RAHS)과 같은 AI 기반 모니터링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프로그램화된 AI를 이용해 객관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전문가들이 그 시사점과 함의를 질적으로 갑론을박하는 플랫폼이 꼭 필요하다.

넷째, 궁극적인 수요자의 입장이 지속적으로 반영돼야 한다. 우리나라 과학기술정책영역에서 매우 부끄러운 개념이 소위 ‘기술사업화 촉진’이다. R&D를 하고 난 뒤에 어디 쓸 사람이 없나 찾아본다는 것이다. 수요자가 기획 단계부터 참여하고 있어야 R&D 기간 중 여건이 바뀌고 선진국의 수준에 변화가 생기는 상황을 수요자가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다. 그 관찰과 입장이 R&D 진행에 반영돼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R&D 제도와 행정이 극도로 유연해야 한다. 연구 목표와 성과지표 그리고 사용 용도가 급격히 변화하고 있으니, 연구자가 이에 대응할 수 있도록 연구자를 지원해야 한다. 지금처럼 규제와 감시로 째려보고 있으면 연구자는 안전한 타협을 택할 수밖에 없다. 과학기술자의 자존감과 전문성을 국가가 찌그려 놓고 있는 것이다. 유연성에 하나를 덧붙인다면 과학기술자에 대한 신뢰에 기반한 제도로 정부 정책의 관점이 180도 전환해야 한다.

교과서나 기존 논문에 없는 새로운 것을 창출해야 하는 과정에서 연구자의 신바람과 자발성은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진정으로 마음이 내키는 일이어야 최선이 발휘되기 마련 아닌가. 제반 규정과 규제들은 연구자에 대한 신뢰에 기반한 성과 위주, 임무 지향, 재량 부여, 보상 위주로 전환하는 터닝포인트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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