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저녁 남산의 N서울타워와 일본 도쿄타워가 동시에 점등한다. 서울과 도쿄를 상징하는 랜드마크에서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축하하는 특별한 행사가 열리는 것이다. 혼돈의 탄핵정국이 아니었다면 좀 더 주목받았을 수도 있을 텐데 안타깝게 됐다.
도쿄타워는 1958년, 서울타워는 1975년 완공됐다. 초대형 타워의 건설이 경제·기술력의 한 가늠자라는 측면에서 과거 두 나라의 격차를 짐작할 만하다. 양국이 수교한 1965년 을사년, 서울과 도쿄의 풍경은 사뭇 달랐다. 고도 경제성장기를 구가하며 올림픽까지 개최한 일본에 비해 4·19와 5·16을 잇달아 겪은 한국은 여전히 가난한 나라였다.
왜 하필 을사년(乙巳年)이었을까. 최근 안중근 의사를 그린 영화 ‘하얼빈’을 보고 나서 엉뚱하게 떠올린 의문이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인 1905년 을사년은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기고 결국 망국의 길을 걷게 된 해다. 안 의사는 을사늑약 이후 가산을 털어 교육 자강과 의병 활동에 나섰다. 그런 을사년에 일본과의 수교라니, 정치적 감각이 없었던 걸까.
6·25전쟁 중이던 1951년 이승만 정부의 제안으로 시작된 한·일 회담은 1965년 최종 타결까지 13년8개월이 걸렸다. 이승만은 “지금 40세 이상 된 한국 사람이 모두 죽어야 국교 정상화가 제대로 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회담을 지시하긴 했지만 일제 강점기를 경험한 세대에서는 타결이 어렵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는 십수 년을 더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조국을 잘 살게 하겠다고 목숨을 걸었고 경제개발 계획의 밑그림도 그려놨는데 돈이 없었다. 자금이 나올 곳은 일본뿐이었다.
결국 나라가 발칵 뒤집어질 정도의 반대를 뚫고 한·일 기본조약과 청구권 협정을 체결했다. 무상 3억달러, 유상 차관 2억달러, 민간 상업차관 3억달러 이상을 10년에 걸쳐 일본으로부터 받았는데, 이 돈을 참 알뜰하게도 썼다.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 건설, 중소기업 육성, 소양강댐 건설, 철도시설 개량, 어선 건조 등 꼭 필요한 곳에 골고루 배정했다. 그 결과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1억달러(1964년)에 불과하던 연간 수출액이 지금은 7000억달러에 육박하고 우리는 세계 10위 경제대국이 됐다. 지난해 우리나라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3만6024달러로 ‘넘사벽’인 줄 알았던 일본(3만2859달러)을 앞질렀다. 1964년엔 1인당 총생산(107달러)이 북한(194달러)과 견주어도 절반 수준밖에 안 됐지만 지금은 GDP 규모가 북한의 60배다. ‘사대 매국의 민족 반역자’라는 비난을 받은 박정희가 무덤 속에서 억울해할지 흐뭇해할지 모르겠다.
상대가 있는 협상이 모두를 만족시키기는 어렵다. 지난 정부 때 한·일 관계를 최악으로 치닫게 한 강제 동원 배상 문제는 60년 전 협상이 불완전한 이유도 있겠지만 정치와 외교로 풀어야 할 일을 사법부에 떠넘기고 방치한 탓이 크다. 양국 관계를 겨우 정상으로 되돌린 윤석열 대통령의 1차 탄핵소추서엔 ‘일본 중심의 기이한 외교정책을 고집했다’는 ‘기이한’ 탄핵 사유가 들어갔다. 그랬던 야당 대표는 불과 한 달여 만에 일본과의 관계를 더욱 심화하겠다고 180도 태세 전환 중이다.
광복 80주년이기도 한 올해 우리는 앞선 두 번의 을사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 번은 나라를 잃었고, 한 번은 나라를 바꿨다. 이번에도 분열과 통합, 자멸과 도약의 갈림길에 섰다. 답은 쉽지만 풀이는 어렵다. 국민 모두의 지혜를 모아 풀어야 할 2025년 을사년의 과제가 가볍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