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섭의 재계 인사이드] 전기를 돈 내고 파는 유럽의 교훈

1 month ago 11

[김우섭의 재계 인사이드] 전기를 돈 내고 파는 유럽의 교훈

봄은 유럽에서 태양광·풍력발전 생산 효율이 높아 ‘풍요의 계절’로 불린다. 햇살이 하루 종일 내리쬐는 데다 너무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바람이 불어 태양광·풍력발전 생산량이 확 늘어나서다.

이런 풍요의 계절이 마냥 좋을 것 같지만 최근 유럽에선 큰 골칫거리다. 전력 수요보다 발전량이 과도하게 많아져 전력 도매가격이 마이너스로 떨어지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어서다. 발전사업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내고 전력을 팔고 있다. 반복되는 전력 과잉 현상이 사회문제가 되는 독일 언론에서는 이를 칭하는 ‘위버슈파이중’(Überspeisung·공급 과잉)이란 단어가 자주 오르내린다.

돈 내고 전기 공급하는 유럽

공급 과잉은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비율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나타났다. 독일은 지난해 재생에너지 발전 비율이 사상 최고인 56%까지 높아졌고, 스페인 역시 59%에 달한다. 태양광·풍력은 친환경 에너지원이란 장점이 있지만 기후 조건에 따라 전력 생산량이 들쭉날쭉하다는 단점이 있다. 전기는 수요와 공급이 맞아야 전력망 주파수(60㎐)가 유지된다. 남아도는 전기를 그냥 버리는 건 불가능하다. 수요와 공급을 맞추기 위해 시장은 ‘마이너스 가격’을 매겨 조절하고 있지만 공급 과잉 일수는 계속 늘고 있다.

독일은 지난해 총 457시간 동안 도매 전력가격이 마이너스로 떨어졌다. 전년(301시간) 대비 50% 이상 증가한 수치다. 1년 중 19일은 생산한 전기를 돈을 내고 팔았다는 것이다. 벨기에는 작년 4월 전기요금이 일시적으로 ㎾h당 -4.57유로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유럽연합(EU)의 지난해 평균 전기요금인 ㎾h당 0.19유로 대비 20배 낮은 가격이다.

겨울엔 정반대 문제가 나타난다. 전기가 부족해 전기요금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둥켈플라우테’(dunkelflaute·어두운 침체) 현상이다. 바람도 불지 않고 구름이 가득한 날이 지속돼 전력 생산이 줄어드는 것이다. 겨울철 난방 수요가 늘면 전력난이 심해지고 전기는 금값이 된다.

스페인 대정전도 재생에너지 탓

위버슈파이중과 둥켈플라우테 현상이 매년 번갈아 일어나자 기업들은 비상이 걸렸다. 지난 1월 12일 독일의 전력 공급 도매가는 한때 ㎾h당 0.936유로를 기록했다. 작년 한국전력 1~10월 평균 판매 단가의 8.7배다. 독일 대표 철강기업 티센크루프는 높아진 전기요금 탓에 작년 4월부터 조강 생산량 감축과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공장 이전을 검토하는 기업도 적지 않다. 독일 상공회의소 조사에 따르면 독일 내 생산 축소 또는 이전을 고려하는 기업 비율이 2022년 16%에서 지난해 말 40%로 급증했다.

재생에너지 확대 부작용은 전기요금에 그치지 않는다. 지난달 28일 발생한 스페인 대정전도 불안정한 전력 수급과 전력망 관리 미흡이 주원인이라는 분석이 많다. 정전이 일어난 지난달 28일 오후 12시30분 스페인 전체 전력 생산량은 27GWh에서 12GWh로 급감했고, 이로 인해 전력망 주파수가 불안정해져 정전이 일어났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시시때때로 바뀌는 풍력·태양광발전의 에너지 생산량이 전력 시스템을 교란시킨 것이다.

반성문 쓰는 독일

독일은 전기요금이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자 뒤늦게 반성문을 쓰고 있다. 반성문의 결론은 과거로의 회귀다. 독일 차기 총리로 유력한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독민주당 대표는 총선 과정에서 집권 후 가스 화력발전소 50개를 짓겠다고 공언했다. 가동을 중단시킨 석탄발전소를 다시 돌리는 굴욕도 감수하고 있다.

무리한 탈원전과 태양광 확대 부작용을 이미 경험한 한국은 어떤가. 반성문은커녕 여전히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유력 대권 후보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대용량 전기가 필요한 ‘인공지능(AI) 시대’를 외치면서 재생에너지 확대 및 원전 감축 기조를 바꾸지 못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 역시 달리진 시대에 달라진 에너지 대계(大系)를 내놓지 못했다. 에너지 정책은 진영 논리가 아니라 국민이 먹고사는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특히 AI 시대엔 값싼 전기가 곧 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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