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최재석 선임기자 = 사초(史草)는 공식적인 역사 편찬의 자료가 되는 원고를 말한다. 역사의 기초 재료인 셈이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사망하고 다음 대 왕이 즉위하고 나면 전대 왕에 대한 역사를 실록으로 편찬하는데 이때 실록 편찬의 근거가 되는 것이 사초였다. 사초를 쓰는 사관(史官)은 왕이 참석하는 모든 행사에 동행해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했고, 그날그날의 정치 상황과 뿐만 아니라 관리들이 평가와 비행. 특이사항 등도 사초에 담았다. 기록의 객관성과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임금조차 사초를 볼 수 없었고, 실록 편찬 후에는 세초(洗草)라 하여 기록을 물에 씻는 방식으로 사초를 없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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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서울시는 3일 조선시대 인조 재임 기간 사관을 지냈던 정태제의 묘에서 출토된 사초를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고시했다. 2014.7.3
사초의 내용은 정치적으로 악용되기도 했다. 우리 역사에서 대표적인 사례가 조선 연산군 때 일어난 무오사화(1498년)다. 그 발단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이다. 사림파의 대부로 알려진 학자 김종직이 초나라 황제 의제(義帝)가 신하인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것을 슬퍼하는 내용으로 제문을 썼고, 그것은 수양대군(세조)의 왕위 찬탈을 은유적으로 비판하는 것으로 당대에 여겨졌다. 결국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성종 때 사관으로 있으면서 사초에 조의제문을 넣으면서 문제가 됐는데 연산군 대에 들어 훈구파가 그 내용을 빌미로 사림파를 대거 숙청했다.
현대판 '사초 실종 논란' 사건도 있었다. 18대 대선을 두 달 앞둔 2012년 10월 당시 정문헌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 의원이 '노무현-김정일 비밀대화록'을 거론하면서 노 전 대통령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NLL(서해 북방한계선) 포기 발언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정쟁이 시작됐다. 회의록 유출 논란으로 시작된 정쟁은 대통령기록관에 보관된 정상회담 회의록 원본을 열람하도록 국회가 결정했음에도 회의록 원본을 찾을 수가 없어 '사초 실종' 논란으로 번졌다. 결국 검찰 수사에 이은 오랜 법적 다툼까지 벌어졌으나 종국에는 관련된 이들이 모두 무죄선고를 받았다.
'내란 사건'을 수사할 특별검사에 지명된 조은석 전 감사위원이 "사초를 쓰는 자세로 세심하게 살펴 가며 오로지 수사 논리에 따라 직을 수행하겠다"는 소감을 밝혀 눈길을 끌었다. 그가 어떤 의미에서 '사초를 쓰는 자세'라는 각오를 밝혔는지 궁금하다. 후세가 교훈으로 삼을 역사의 기초자료를 제대로 남겨야 하는 엄중한 사명 의식과 책임감의 표현으로 봐야 하나. 한편에선 이런 각오가 즉각적인 반발을 부르기도 했다. 권영국 민주노동당 대표는 성명에서 "조 전 위원 그 자신이 용산 참사 편파수사의 사초"라며 특검 지명 취소를 요구했다. 조 전 위원이 검사 시절 2009년 용산 참사 특별수사본부(특수본)를 총괄 지휘하며 편파·부실 수사를 했다는 주장이다.
법조계에서는 조 특검이 일선 검사 시절 '독하게' 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수사 능력에서는 적격이라는 평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국민의힘에선 감사위원으로 있으면서 윤석열 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다는 이유로 편향적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조 특검은 야당이 주장하는 '정치보복' 논란을 불식시키고 누구나 신뢰할만한 수사 결과를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옛날 사관들은 자신의 기록이 권력의 칼날이 돼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도 오직 역사의 진실을 기록해야 한다는 소명 의식에서 붓을 들었을 것이다. 이런 자세로만 수사한다면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진 않을 것 같다.
bondong@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년06월16일 11시44분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