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암살[임용한의 전쟁사]〈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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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3월 28일 중국 상하이의 미국 조계(租界)지에 있던 동화양행 호텔 2층에서 김옥균이 홍종우가 쏜 권총에 맞아 숨졌다. 김옥균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엇갈리지만, 그는 풍운아라는 명칭이 딱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일본을 지나치게 신뢰했다는 비판이 있지만, 그도 일본을 믿지 않았다. 어쩌면 일본도 그 사실을 눈치챘기에 작은 도움도 주지 않고 이용하려고만 들었던 것 같다. 초조해진 김옥균은 이해에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자 이 기회를 이용하고 싶어 했는데, 이홍장이 상하이에서 만나고 싶어 한다는 전갈이 왔다. 주변인 모두가 음모라고 의심했다. 심지어 이 일을 주선한 이일직과 홍종우에 대해 박영효와 윤치호를 비롯해서 일본에서 사귀었던 지인들 상당수가 자객 같다고 김옥균에게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한 일본인은 김옥균이 상하이로 출발했다는 말을 듣고, “아! 김옥균이 죽는구나”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암살 4개월 후인 7월에 갑오개혁이 추진되고, 박영효는 사면을 받아 귀국했다. 김옥균이 지인들의 충고를 따라 상하이로 가지 않았다면 조선으로 귀국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의 삶은 비극적으로 끝났을 것 같지만, 김옥균으로서는 오랫동안 고대하던 기회가 눈앞에 있었는데 그것을 붙잡지 못했다.

김옥균은 예리하고 두뇌가 비상한 인물이었다. 신념과 자기 확신이 강했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부족하고 자만심이 너무 강했다. 이것이 치명적인 결점이었다. 김옥균도 홍종우가 자객임을 눈치채고 있었는데, 자신이 감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홍종우는 이를 역이용했다. 이홍장이 그를 부를 리가 없는데, 여기에 넘어간 것도 초조함과 자만심 때문이었다.

똑똑한 사람일수록 신념이 그를 망친다. 아무리 똑똑해도 그가 아는 세상은 극히 일부이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고 권력자가 신념에 사로잡히면 나라는 불행해진다.

임용한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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